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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정당하다. 이른바 ‘장자연 편지’가 가짜인 것으로 판명 난 만큼 전면 재수사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그들의 입장은 정당하다. 2년 전의 ‘장자연 수사’는 할 만큼 한 것이라는 그들의 전제가 옳다면 그렇다. ‘할 만큼 한’ 수사의 반증사례로 간주되던 ‘장자연 편지’가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으니 그들의 전제를 스스로 부술 이유가 없다.

반박하는 측도 정당하다. ‘장자연 편지’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장자연 수사’를 다시 해야 한다는 그들의 입장도 정당하다. 2년 전의 수사는 ‘하다 만’ 수사라는 그들의 전제가 옳다면 그렇다. ‘장자연 편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 ‘달’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들의 전제를 스스로 부술 이유가 없다.

확연하다. 어느 하나의 전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논쟁과 공방은 끝나지 않는다. 분명하다. 두 전제에 대한 검증은 2년 전의 ‘장자연 수사’에 대한 사실판단으로 귀착된다. 

그런 점에서 눈 여겨 볼만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장자연 편지’ 필적 감정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에 ‘한겨레’가 보도한 내용이다. 2년 전의 ‘장자연 수사’ 때 참고인 조사를 받은  사람이 한 증언이다. 2007년 10월 서울 강남의 한 중국집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조선일보’ 사주 일가인 ㅂ씨가 ‘조선일보’의 다른 계열사 사장,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 기업인 등과 함께 장자연 씨를 만났다는 증언이다. 자신은 물론 장자연 씨의 소속사 전 대표 김성훈 씨까지 경찰 조사과정에서 이같이 진술했는데도 경찰이 ㅂ씨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고, 최종 수사 발표에서 ㅂ씨와 관련된 사항이 일체 포함되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귀 담아 듣고 눈에 힘줘서 확인해야 하는 증언이다. 이 사람의 증언이 ‘할 만큼 한’ 수사와 ‘하다 만’ 수사를 가를 기준점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연유다. 이 사람의 진술이 최종수사결과에 반영되지 않은 연유다. 그 연유가 이 사람 주장대로 경찰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사하긴 했는데 별다른 혐의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를 가려내는 일이다.

마침 경찰도 다시 살펴보고 있다니 기다리면 된다. 법원에 넘어간 당시 수사기록 목록에 ㅂ씨 관련 부분이 있다고 하니, 그래서 수사기록 대출신청을 해놓았다고 하니 지켜보면 된다. 판단은 이 때 해도 늦지 않다. 당시의 수사 내용이나 조사 방법 등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수사관들의 기억력을 어떻게 재부팅하는지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제2, 제3의 증언과 문제제기가 나오지 않는 한 이 사람의 증언과 경찰의 설명이 판을 가른다. 제3라운드 개시 여부를 결정짓는다.

▲사진=고 장자연 씨 영정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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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왕조국가라는 비판에 누가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권력 세습은 물론 전제왕조였던 조선에서도 꺼렸던 왕실 종친('세자'의 고모와 고모부)의 권력 핵심 기용까지 감행하는 북한인데.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왕조국가라고 비판해봤자 당사자들은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유일체계를 보위해야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인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김정은 후계체제가 앞으로 어떤 우여곡절을 겪을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북한 정보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는 미국의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조차 “솔직히 북한의 지도부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또는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하는 판인데.

남한 사회가 김정은 후계체제에 당장 대처할 방법은 없다. 청와대 관계자의 말처럼 “당분간 (담담하게) 더 지켜봐야” 한다. 헌데 난감하다. 청와대를 둘러싼 보수세력은 담담하게 지켜볼 용의가 없어 보인다.

‘중앙일보’가 주장했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3자의 자세로 방관하는 대북정책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제시했다. “북한 동포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쪽으로 왜곡되지 않을 방법”을 전제로 “북한 체제의 변혁을 촉진하거나 유발”해야 한다고 했다. ‘동아일보’가 주문했다. “소극적 대북 정책을 계속한다면 3대 세습을 안착시키려는 북의 술책에 말려들 수도 있다”며 “김일성 일가 권력 세습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북한 주민이 정확히 알도록 다양한 수단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적극 공세를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사뭇 다르다. 조중동의 이 같은 입장은 “(정부가)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에 따라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한국일보’의 주문과 다르고, “압박 일변도로 가면 강성 체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한겨레’의 우려와 다르다.

따지지는 않겠다. 어느 쪽 입장이 타당한지는 살피지 않겠다. 늘 나타났던 입장차이니까, 어차피 평행선을 달릴 입장차이니까 하는 말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역설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담담하게 지켜보는’ 상황이다. 남한이 북한의 ‘향후’를 담담하게 지켜보기 이전에 북한이 남한의 ‘대처’를 담담하게 지켜볼 개연성이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남한이 압박하면 이를 선군정치와 유일체계를 강화하는 구실로 역이용하고, 남한이 유화책을 펴면 이를 후계체제 안착의 경제사회적 토대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남한의 ‘힘’을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착을 위한 ‘힘’으로 흡수하려 할 것이다.

혹여 모른다. 남한의 대북정책이 김정은 후계체제 안착 여부를 가를 유일한 외부 규정력이라면 그것의 재조정 여하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완전히 뒤바뀔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그런 중국이 북한의 후계체제는 “내부 사무”라며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또한 대북정책 기조를 전환하려 한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장기적으로 다자회담을 통한 대화국면으로의 전환을 시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 점을 중시하면 생산적이지 않다. 대북정책을 놓고 남한 사회에서 입씨름 하는 건 김정은 후계체제 ‘향후’에 결정적 규정력을 미치지 못하면서 남한 사회 내의 이념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입체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후계체제라는 요소 하나에만 단선적으로 대처할 게 아니라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제 요인을 두루 살피면서 대북정책을 재조정해야 한다.

▲사진=어제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김정은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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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직접적인 증거 또한 아니다.

한명숙 전 총리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을 만날 때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강동석 전 건교부 장관이 동석했다는 ‘한겨레’ 보도 역시 ‘정황’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필이면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으로서 곽영욱 전 사장이던 희망하던 공기업(석탄공사와 남동발전)를 관할하던 정세균 대표가 왜 동석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새롭지는 않다.

‘한명숙 공대위’의 양정철 대변인이 일찌감치 밝혔다. 한명숙 전 총리와 곽영욱 전 사장은 안면이 있던 관계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일대일로 만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한겨레’의 보도는 양정철 대변인의 이같은 주장을 뒤엎는 것은 아니다. 양정철 대변인의 주장처럼 가깝지 않은 사이였다면 한명숙 총리가 곽영욱 전 사장을 총리 공관으로까지 부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 아울러 그런 자리에 당시 장관이던 사람까지 동석시켜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직접 증거는 아니다.

어차피 진실은 법원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다.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대로 검찰이 돈이 오간 직접적인 증거, 즉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어차피 최종 판단은 법원에 의해 내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다. ‘한명숙 사건’과 아주 유사한 다른 사건에 눈길을 돌린다.

한나라당의 박진 의원이 재판을 받고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서 치열한 법리공방을 벌이고 있다.

흡사하다. 한쪽은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한쪽은 받은 일이 없다고 맞서는 면에서, 만난 건 사실이지만 돈이 오가지는 않았다는 항변이 나오는 면에서, 돈을 건넸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검찰이 직접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기소했다는 면에서 두 사건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법원의 태도는 아주 신중하다. 원고와 피고가 팽팽히 맞서는 것을 보고 이례적으로 시연까지 연출했다. 돈을 줬다는 박연차 전 회장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 박진 의원을 만날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양복을 입히기까지 했다. 박연차 전 회장이 정말 2만 달러가 든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면 폼새에서 티가 나지 않았겠느냐는 가설 위에 이렇게 재연극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정표가 될지 모른다. 박진 의원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한명숙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의 참고사례가 될지 모른다. 법원 연출의 재연극이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 또한 정황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법원의 판단 잣대는 다른 데서 구할 것이다. 그것이 일부 언론이 보도하는 것처럼 뇌물 공여자의 진술의 일관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을 증거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증거의 직접성을 중시하며 이런 진술과 정황을 배척하는지 지켜볼 일이지만 아무튼 하나의 창은 될 수 있다. 치열하고도 기나긴 법정 공방의 끝을 미리 엿볼 수 있는 창 말이다.

박진 의원에 대한 판결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사진 출처=한명숙 전 총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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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나름’이라는 말 그대로다. 행위는 하나인데 해석은 둘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해빙’ 또는 ‘데탕트’로 해석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어제 청와대에서 만나 ‘웃음꽃’을 피운 것을 중시하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조선일보’는 “(두 사람 간의) ‘해빙(무드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고 전망했고, ‘중앙일보’는 “‘데탕트’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두 사람 사이에 입장차가 여전한 것으로 진단했다. “의견 교환도 있었고 공감한 부분도 있었다”는 박근혜 전 대표의 말 가운데 ‘도’ 한 글자를 뽑아내 이렇게 짚었다. 이 한 글자에 의지해 ‘경향신문’은 “일부 현안을 두고는 이견이 있었음을 시사했다”고 풀이했고, ‘한겨레’는 “두 사람이 주요 현안에 의견 일치를 본 것 같지는 않다”고 추정했다.

가르지 말자. 두 개의 해석 가운데 어느 게 객관적 사실에 근접한 것인지 가르지 말자.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소상히 밝히지 않는 한 이 역시 보기 나름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웃는다고 웃는 게 아닌’ 정치인의 일반적 생리를 간과했는지 모른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공감하지 않은 부분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공감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평가절하 했는지 모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다 보니 보기 나름의 진단을 내놓은 것이다.

유용하지 않다. ‘정답을 모르는 찍기’라는 점에서 유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 정치발에 미치는 영향 면에서 보더라도 유용하지 않다.


과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유력 정치인의 도리와 책무를 강조하고 촉구하는 작업은 뒷전으로 밀어놓은 채 계파 수장의 일거수일투족만 좇는 보도 행태가 공간을 넓혀줬다. 계파 수장이 계파 논리에 경도돼 계파의 안위를 챙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과 계파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줬다.

이번에도 똑같다. 왜 말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어야 할 대목에 가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남북문제,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등 국정 현안을 거론해 놓고서도 “구체적 내용은 얘기하지 않겠다(박근혜)”고 차단막을 치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에 대해 하루 빨리 입장을 밝혀야 정치 갈등이 줄어든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남북문제,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가 정치 갈등을 낳는 주요인인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라면 여권 유력 정치인에게만 ‘귓속말’을 할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얘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 차기를 노리는 여권 유력 정치인이라면 민감한 국정 현안을 대통령에게만 ‘낮은 목소리’로 말할 게 아니라 국민 앞에서 당당히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아니라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6일 청와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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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위기’입니다. 너나 할 것 없습니다. 대통령부터 민초까지 모두가 2009년을 여는 말로 ‘위기’를 꼽습니다. 그리고 위무합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고, 위기는 곧 기회라고 위무하고 격려합니다.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위기’임이 분명하고, 이 ‘위기’에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어떻게든 ‘희망’의 끈을 부여잡아야 합니다.

뭘까요? ‘희망’의 단서는 뭘까요?

‘한겨레’는 ‘나’와 ‘가족’을 제시합니다. 여론조사 결과 84.3%의 국민이 ‘희망이 있다’고 대답했고, 절반 이상이 ‘나’와 ‘가족’에서 희망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서울신문’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당층이 53.8%에 달합니다. 꼭 1년 전의 같은 조사보다 8.3%포인트가 늘었습니다. 비전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오히려 커지는 게 작금의 상황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가족’에게서라도 희망의 단서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게서 아랫목 같은 온기를 느끼며 ‘나’에 충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경제에 삭풍이 불수록,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믿고 의지할 데는 ‘나’ 자신과 ‘가족’ 밖에 없습니다. 이런 존재조차 없으면 버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근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건 '기본'입니다.

'근본'이 뭔지는 굳이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한겨레’ 여론조사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나를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불황’입니다. 그 비율이 51.7%입니다. ‘실업・일자리 부족’도 14.7%에 달합니다. 절망의 이유는 ‘나’와 ‘가족’에 있지 않습니다. 외부 여건, 먹고사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지 않는 한 ‘나’에 충실하고 ‘가족’에 의지해도 절망의 늪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자존감을 잃고 ‘가족’에 대한 부담감을 키우기 십상입니다.

풀려면 변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변해야 하고 여당이 변해야 합니다. ‘한겨레’ 여론조사 결과 65.7%의 국민이 ‘우리 사회 절망의 책임’ 주체로 여당과 대통령을 꼽은 연유를 살펴야 합니다. 대통령에 대해 희망을 기대하는 심리(49.9%)가 부정하는 심리(45.9%)보다 우세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무 착한 국민입니다. 실망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다수의 국민이 그렇게 대통령과 여당을 바라봅니다. '강부자' 내각을 구성해도, ‘부자감세’를 밀어붙여도 한 가닥 남은 기대의 끈마저 놓지는 않습니다.

돌아보길 간청합니다. ‘전쟁’의 상대가 누구인지, ‘속도전’이 결국 누구를 제치려는 것인지 다시한번 돌아보기를 권고합니다. 등산용 자일로 몸과 몸을 엮은 야당 의원들은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통해 ‘제발’을 외치고 ‘옥쇄’를 각오하는 국민이 따로 있습니다.

이들을 돌아보길 청합니다. 이들은 결코 극소수가 아닙니다. 각종 정부정책에 60% 안팎의 반대의견을 펼치는 다수의 국민입니다.

ps.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드릴 수가 없네요. 대신 이렇게 말씀드리렵니다. 용기 잃지 마시고 꿋꿋하게 버티시기 바랍니다. 흥망과 성쇠와 부침은 자연의 이치이니까요. 인고와 노력이 동반된다면 말이죠.

Posted by '토씨'

아주 상징적인 현상입니다. ‘한겨레’의 고광헌 사장이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삼성 광고 없는 경영’을 선언한 게 그렇습니다.


얼핏 봐선 난센스입니다. 언론사 사장이 ‘일개’ 그룹의 광고와 관련해 중대선언을 하는 게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성의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한겨레’ 전체 광고매출에서 삼성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15% 정도였다고 합니다. 신문사 수입의 80∼90%를 광고수입이 차지하니까 삼성의 광고는 ‘한겨레’의 경영을 좌우할 정도로 큰 요소였다고 봐야 합니다.


이미 예상했던 현상입니다. 삼성이 ‘한겨레에 광고를 줄 수 없다’고 공식통보한 게 그렇습니다. ‘한겨레’가 삼성의 비리를 집요하게 보도해온 데 대한 대응이란 점만을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난 4월 삼성이 이건희 회장 사퇴와 전략기획실 해체를 선언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삼성의 광고 재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언론계가 내다봤습니다. 전략기획실은 ‘창구’였습니다. 전략기획실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언론사의 광고 요청을 전략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검토해 집행 여부를 조율하는 ‘창구’였습니다. 그런 전략기획실이 해체되니까 광고 집행의 탄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삼성의 그룹 분위기로 볼 때 개별 계열사가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광고 집행을 결정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생뚱맞게 전략기획실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는 한, 광고에 눈이 멀어 기업 감시의 눈길을 접지 않는 한 언론사가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행여 삼성이 광고 집행을 재개한다고 해서 경영상황이 확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삭뚝삭뚝 자르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내년 광고홍보비를 대폭 줄이고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해 광고홍보비를 큰 폭으로 삭감하고 있습니다. 업계에서 들려오는 얘기로는 30% 삭감은 ‘기본’이라고 합니다.


논란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체 광고시장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정부광고의 집행을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프레시안’ 같은 인터넷 언론에는 한 푼도 집행하지 않은 반면 신생․소규모 인터넷 언론에는 정부광고를 집행했다며 편파․편중 논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기부터 살고 봐야 하는 대기업에 광고 집행을 늘리라고 얘기할 수 없는 일이고, 설령 그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씨알이 먹히지도 않습니다. 정부 광고 집행이 공평하게 이뤄지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정부광고에 목을 메는 현실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언론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업의 긴축 경영으로 전체 광고시장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건 공통된 어려움입니다.

특정 언론사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언론사가 직면한 광고 위축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금력과 권력의 견제에 시달려야 하는 특정 언론사들은 어떻게 경영 혹한기를 넘겨야 할까요? 내년 한 해 거세게 휘몰아칠 2중고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요?


특정 언론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실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하는 긴축 경영 외에 뾰족수가 없습니다. 임금을 동결 또는 삭감하는 일 외에 별달리 손 쓸 방도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한다고 해서 긴축의 극단적 조치를 함부로 동원할 수가 없습니다. 감원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영환경에 놓여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 뉴스를 생산해왔기에 감원은 곧장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계인원으로 뉴스를 생산해왔기에 감원은 즉각 생산기반의 붕괴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언론사가 아니라 독자를 향해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독을 해주면, 클릭을 해주면 도움이 될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 브랜드 가치가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당장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종이신문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구독자가 늘면(실제로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촛불시위 후 자발적 구독자가 수만명 늘었습니다) 비용이 늘어납니다. 종이와 잉크를 구독자 증가분만큼 더 투입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올해 들어 종이값만 해도 20% 이상 뛰었습니다.


비용이 증가하는 만큼 수입도 확대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독료 수입이야 구독자수 증가분에 정비례해서 늘겠지만 그것은 경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문값이 원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독자 수가 하루아침에 수십만, 수백만 명으로 늘어 유가부수 1,2위를 다투는 정도가 되면 광고단가 인상이라도 꾀해보겠지만 자발적 구독자 증가분은 이런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또 어찌어찌 해서 구독자 증가분을 광고단가 책정에 포함시킨다 해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업들이 앞다퉈 광고 집행을 줄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 상당기간은 광고단가가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광고량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력의 개입에 휘둘리는 방송계가 언론대란의 제1전선이라면 금전의 논리에 난도질 당할 처지에 몰린 온오프라인 신문은 제2전선입니다. 

Posted by '토씨'

언론지형에 지각변동이 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언론재단이 9월초 중·고교생 4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류 언론, 특히 조·중·동에 대한 불신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 및 사회기관 30개를 선정해 '전혀 신뢰하지 않는 경우 0점, 중립적인 신뢰는 50점, 매우 신뢰하는 경우 100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기게 한 결과 MBC(59.2), KBS(55.69), 네티즌(55.05), 포털(54.57), ‘한겨레’(52.87)가 1위에서 5위를 차지했다. 반면 ‘중앙일보’는 36.42로 22위, ‘동아일보’는 34.82로 24위, ‘조선일보’는 33.81로 25위에 그쳤다.

10대가 대학생이나 성인이 됐을 때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뉴스매체로 46.1%가 인터넷 포털을, 24.8%가 지상파TV를, 11.5%가 인터넷 신문을 꼽은 반면 무료신문은 6.9%, 신문은 4.9%에 불과했다.

현재 10대가 학교에서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은 ‘한겨레’(35.1%)였고 이들이 성인이 돼 스스로 신문을 구독하게 될 경우 선택할 신문도 ‘한겨레’(22.5%)가 1위였다.

이 연구결과에 가정 즉 ‘지금의 10대가 성인이 되면’이란 가정이 덧붙어져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온다. 언론지형에 지각변동이 올지 모른다고, 조·중·동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추측이 나온다.

하지만 예단할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돼 있다.

그 이유 역시 가정에 있다. ‘지금의 10대가 성인이 되면’이란 가정이 너무 허술하고 유동적인 게 문제다.

지금의 10대가 성인이 되는 건 부동의 진리다. 하지만 지금의 10대가 성인이 돼서도 지금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건 부동의 진리가 아니다.

적절한 예가 하나 있다.

‘한겨레’가 창간된 시점은 1988년 5월. 87년 6월항쟁의 기운이 여전하던 그 시절에 6월항쟁의 거름을 받고 태어났다.

승승장구했다. 판매부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심지어 당시 대학생 일부는 ‘한겨레’를 교재 삼아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췄다. 판매부수 증가가 멈췄다. 그리곤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다. 크게 늘지도 않고 크게 줄지도 않는 판매부수를 보이고 있다.

조·중·동은 어떨까?

당시의 20대에게 조·중·동은 규탄대상이었다. 집회장에서 종종 붙태워지는 신문이 조·중·동이었고 취재거부를 당하기 일쑤였던 기자도 조·중·동 소속이었다(세 신문에 대한 태도에 편차가 있긴 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판매부수 면에서 여전히 부동의 1위를 견지하고 있고 조·중·동은 굳건히 신문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왜일까? ‘한겨레’에 우호적이고 조·중·동에 적대적이던 386세대가 신문시장의 주류인 40대(신문시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연령대를 40대로 설정한다. 이들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신문구독 결정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가 됐는데도 왜 언론지형에 지각변동이 오지 않는 걸까?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인 경품 지급이나, 논조보다 정보를 우선해서 살피는 신문 읽기 방법 등의 요인이 선호도와는 일정하게 다른 구독 패턴을 낳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어쩌면 가장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인이 있다. 계층의식이다. 이것이 세대 의식을 대체한다.

세대 의식은 한정적이다. 그 시대 그 세대에게서나 의미를 갖는 의식이다. 연령대로 묶인 세대 의식은 나이가 들어 사회에 진출하고 생활조건·환경을 달리하면서 계층 의식으로 분화한다. 더불어 그 때의 세대 의식은 희미해진다.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세대 의식은 어느 순간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강고한 삶의 논리에 포박당한 계층 의식이 들어선다.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서민층은 신문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인구 분포로는 서민층이 절대 다수를 점하지만 신문 시장에 유효한 영향을 미치는 층은 중상층이다. 그리고 기업과 관공서다.

의식은 그리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실질 구매력이다. 그리고 실질 구매력은 계층에 따라 달리하는 지갑의 두께와 비례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살피자.

시대가 바뀔수록 매체 선호도가 바뀌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매체가 어느 세대에겐 라디오일 것이고, 어느 세대에겐 TV일 것이며, 또 다른 어느 세대에겐 신문 또는 인터넷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체 종류에 따라 흥망성쇠를 달리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니 그럴 가능성을 높이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갈라선 안 된다. 신문사와 인터넷에, 신문사와 지상파 또는 케이블TV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설정하고 선호도와 영향력을 기계적으로 재선 안 된다.

현재의 10대가 선호하는 포털에 콘텐츠를 채워주는 곳 가운데 한 곳이 조·중·동이다(‘다음’은 빼고). 언론사 사이트별 조회수만 놓고 따져도 조·중·동의 조회수와 ‘한겨레’의 조회수에는 수백만의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어느 순간 조·중·동이 10대가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지상파 또는 케이블TV에 등장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문어발식으로 현재의 10대를 끌어안으려 할지 모른다.

초를 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연구결과를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유동 상태임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인터넷 : 방송 : 신문이라는 구분법으로 선호도와 신뢰도를 재는 게 지금 이 시점에서도 완벽하지 않고 앞으로는 더욱 더 불명료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언론지형의 지각변동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보다 냉철하게 현실을 보라고 고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