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이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아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군요.
‘아빠, 편지 봤어?’
느닷없이 웬 편지 타령인가 싶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무슨 편진데?’
‘…아니, 관리비 고지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뭐 반가운 편지라고 이른 아침부터 호들갑인가 싶어 그냥 “알았어” 하고 끊었습니다. 그리곤 까맣게 잊었죠.
집에 들어가니 침대 옆 탁자에 문제의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봉투가 놓여있더군요. 달갑지 않았습니다. 한파로 끌어올린 보일러 온도만큼 관리비 또한 늘어났을 게 분명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관리비는 전 달에 비해 8만원 넘게 더 나왔더군요.
한숨 크게 내쉬고 봉투를 집어던지려던 순간 흰 종이가 끼어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포장이사업체의 천연색 홍보전단과는 다른 순백의 종이였습니다.
‘아빠에게.
아빠, 나 때문에 화나거나 짜증날 때가 자주 있지? 비록 작은 돈이지만 받아주고 앞으로 오래오래 살자. 메리 크리스마스!!!
아빠의 자랑스런 장남, ○○올림’
순백의 종이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렁이가 기어가듯 한 글자 한 글자가 제각각 누워있었습니다.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반강제로 쓴 의례적인 편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쓴 편지를,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받은 게 처음이라 의외였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 된 놈이 아빠에게 돈을 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환갑 넘은 아버지와 서른 넘은 아들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니까요.
뜨악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봉투를 다시 뒤졌습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10원짜리 동전 하나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아들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무슨 돈인데?”
“응, 만원.”
“만원? 네가 돈이 어딨어?”
“용돈 아껴서 모은 거야.”
“그걸 왜 아빠에게 줘?”
“아빠 돈 버느라고 힘들잖아.”
“그래서 보태주려고?”
“응.”
“근데 왜 돈이 없냐?”
“심부름하느라고 썼어.”
“심부름? 무슨 심부름?”
“할머니가 뭐 사오라고 하셨는데 돈 꺼내기 귀찮다고 일단 그 돈으로 쓰래.”
“그래서?”
“나중에 받았어.”
“그럼 왜 아빠한테 안 줘?”
“히히, 깜빡했어.”
저도 웃고 아들도 웃었습니다. 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아들은 뒷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리곤 잠깐 동안의 정적…. 여전히 미소를 흘리는 아빠를 남겨둔 채 방을 나가던 아들이 돌아서며 한 마디 하더군요.
“아빠, 선물 좀 잘 감춰.”
“왜?”
“△△이 봤잖아.”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이 장롱 속에 숨겨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발견했다고 밀고하는 아들이 양미간을 찌푸립니다. 천재라더니 조그만 선물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냐는 투로 침대에 널브러진 아빠를 내려다봅니다.
벌써 다 컸나 봅니다. 아빠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도 그렇고, 같은 돈으로 아빠와 할머니의 환심을 동시에 사는 것도 그렇고, 생색은 다 내면서도 결국은 제 주머니로 돈을 집어넣는 것도 그렇고…. ‘원소스 멀티유스’의 비법에다가 봉이 김선달의 비기까지 벌써 깨우친 것 같습니다^^
팔불출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아들은 정말 “자랑스런 장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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