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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 5명이 죽었습니다. 그 뒤 그들은 도심 테러범이 됐습니다. 화염병과 시너로 무장한 채 옥쇄투쟁을 한 무서운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 뒤 영정은 파손됐고 유족은 폭행당했습니다. 추모집회 현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 뒤 진실은 묻혀있습니다. 법원이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결정했지만 검찰은 한사코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회장이 죽었습니다. 그 뒤 동료노동자들은 폭력범이 됐습니다. 죽창으로 경찰을 마구 찔러댄 무자비한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 뒤 묻혔습니다. 박종태 지회장이 죽음으로 말하려고 했던 화물노동자들의 처우는 묻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그 뒤 그는 못난이가 됐습니다. 측근비리를 막지 못한 사람이 됐고 비극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 뒤 조문객은 ‘잠재적인 시위꾼’이 됐습니다. 언제 촛불을 들지 모르는 요주의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같습니다. 죽은 자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또 어떤 이는 ‘사회적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존재의 조건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잡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들은 추모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어떤 이들의 ‘해원’을 읍소하고, 또 어떤 이의 ‘번민’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남은 자들은 그게 남겨진 자들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전이나 사후나 똑 같습니다. 법은 매정하고 공권력은 철통 같습니다. 가슴은 팍팍하고 눈물은 말랐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서슬 퍼런 찬 기운이 돕니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찬 기운이 녹을 것 같지 않습니다.

김동길 명예교수가 했다는 말이 반증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야단법석”을 떠는 세태를 비판하며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인가”라고 한탄했다는 그의 말이 시사합니다.

이 나라에는 법만 있습니다. 그것도 눈물이 메말라 버린 ‘진시황의 법’만 있습니다.

감정과 동정이란 표현은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그 표현에 ‘부적절’이란 선입견이 깔려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신 배려와 이해란 말을 쓰겠습니다.

현 정권엔, 그리고 보수 집단엔 배려하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경쟁자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하려 하지 않고 존중하려 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가 법과 상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는 법의 대체 개념이 아니라 법의 보완 개념인데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는 법의 정당성과 법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개념인데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득하려 하지 않고 굴종하기를 강요합니다. 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최우선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따뜻한 보수’는 없습니다.

▲사진=노무현의 눈물 ⓒ프레시안

Posted by '토씨'

#1
“살짝 싫었죠. 지금 제 상황을 공개하는 거는 살짝 아니라고 보는데….”

아이는 이 말 한 마디만 던지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어떻게 대했느냐고 물어도, 심정이 어땠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엷은 미소만 띤 채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철거민의 아들입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철거민 실태를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아이입니다.

‘살짝’이 아니었나 봅니다. 지난 해 여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일 때 한 일간지가 인터넷 방송으로 이 아이의 생활실태를 내보낸 후 상처를 ‘많이’ 받았나 봅니다.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꼬치꼬치 캐물어도 “속상했다”는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자기네 애 아냐?”라고 묻기에 애한테 뛰어가 물어봤지만 묵묵부답이더랍니다.

이 아이는 그 후 거처를 옮겼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외할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다세대 주택 2층이었습니다. 재개발·재건축으로 들어선 아파트엔 견줄 수 없는 서민 주택이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기거하는 철거민 숙소보다는 나은 집이었습니다.

#2
그 일간지는 형식상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이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고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그 일간지의 파급력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국내 유수의 일간지라곤 하지만 지면이 아니라 웹사이트에, 그것도 방송으로 올린 것이었습니다. 일부러 찾아야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철거민의 아들로, 못 사는 집 아이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3
연쇄살인 피의자 강모 씨의 공개된 얼굴을 보면서 다른 아이들을 떠올렸습니다. 강씨의 아들들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살인범의 아들’로 낙인찍힐 아이들입니다.

강씨의 얼굴을 공개한 일부 신문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밝힙니다. 한 신문은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후 미국인들이 조승희 씨의 가족이 느낄 충격을 걱정하고 위로한 점을 예로 들면서 “우리 사회도 그만큼은 성숙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신문은 “범죄자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감내해야 한다고 본다”는 한 법대 교수의 말을 전합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공익이니 알권리니 하는 거창한 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태평하고 매정한 주장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강씨의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은 또래집단입니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집단입니다. 강씨의 아이들에게 닥칠지 모를 고통은 인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태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로 ‘인간의 존엄성’을 제한당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데 어찌 “성숙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어찌 “감내하라”고 다그칠 수 있을까요?

#4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율배반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두 신문은 사이버 모욕죄 제정을 옹호해온 곳입니다. ‘악플’이 야기하는 인격살인을 맹비판하면서 사이버 모욕죄 도입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곳입니다.

이랬던 두 신문이 ‘모욕’의 길을 앞장서 열었습니다. 강씨의 아이들에게 ‘살인범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여지를 활짝 열었습니다.

아닐까요? 그렇게 ‘모욕’의 여지를 만들어도 우리 사회가 성숙했기 때문에 실제로 ‘모욕’을 하는 일은 없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왜 굳이 사이버 모욕죄를 제정해야 할까요? 사회가 알아서 자제하고 자정할 텐데 굳이 사법 칼날을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사이버 모욕죄가 더 필요한 걸까요?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부수적인 악영향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사이버 모욕죄를 제정해 더 강하게 단속하는 게 나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왜 굳이 감내하라고 다그치는 걸까요?

주관적 판단이지만 ‘살인범의 아들’이란 손가락질도 ‘모욕’에 해당한다고 확신하기에 반문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자세와 능력 이외의 다른 요인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기에 묻는 겁니다.

PS. 오해할지 모르겠네요. 이런 반문이 사이버모욕죄 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까봐 걱정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이버모욕죄 제정을 반대합니다. 모욕행위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처벌할 법적 근거가 있는데도 추가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모욕감을 느끼는 주체는 따로 있는데 국가가 대리 응징하려고 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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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경찰은 5층 옥상에 있는 철거민들을 진압하면서도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지 않았다. 시너통이 널려있는데도 소방차 한 대 대놓지 않고 물대포를 쐈다. 별다른 설득 시도 한 번 없이 농성 25시간만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했다.

경찰의 조치가 이랬다. 누가 봐도 명백한 '과잉 진압'이었다. 

그럼 끝난 걸까? ‘용산 참사’의 진상은 모두 규명된 것이고 책임자 문책만 남은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 운위되는 것은 '상식'에 기초한 것이다. 경찰의 진압이 '진압수칙'을 위반한 것인지조차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둘러댈 여지가 있다. '판단'의 문제로 치환시키려 할 수 있다. 여차하면 정치적· 도의적 차원에서 고개 숙이는 정도로 가름하고자 할 수도 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건 사법적 판단이다. 바로 이 문제에서 유동성이 남아있다. 사법논리에 의거하면 경찰의 과잉진압은 ‘용산 참사’의 조건을 제공했을 뿐이다. 참사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가해행위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불이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불의 발생 원인과 주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에서 갈릴 수 있다. ‘용산 참사’ 이후의 상황이, 그리고 정치적 국면이 달라질 수 있다.


엇갈린다. 불이 발생한 원인과 불을 일으킨 주체를 놓고 전하는 목소리가 엇갈린다. 이런 식이다.

“시위대가 던지려는 화염병이 물대포에 맞아 바닥에 떨어지면서 불이 났다. (바닥의) 화염병 불길이 시위대가 쌓아 둔 시너에 옮겨 붙어 갑자기 크게 번지는 것을 봤다.” - 한겨레

“망루 위에 있던 시위대가 또 다시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화염병의 불꽃은 시너를 타고 화염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망루 아래 쌓여 있던 70여개의 시너통에 옮겨 붙었다.” - 중앙일보

일치한다. 두 보도 모두 화염병이 바닥에 떨어져 시너에 불이 옮겨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갈린다. 화염병이 바닥에 떨어진 경위에 대해서는 두 보도가 극명하게 갈린다. 한 보도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의해 화염병이 바닥에 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고, 다른 한 보도는 철거민이 고의로 화염병을 던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6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주체를 다르게 규정할 정도로 큰 차이다. 

그래서 엄정해야 하고 치밀해야 한다. 불이 난 원인을 가리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된다.

하지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엇갈리는 두 보도는 엇갈리는 증언과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한겨레’의 보도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고, ‘중앙일보’의 보도는 또 다른 목격자와 경찰의 주장에 터 잡고 있다.

이런 상태에선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엇갈리는 두 주장을 평면적으로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다.

감식과 같은 ‘과학적’ 검증방법이 있겠지만 잘 될지는 알 수 없다. 경찰 외에는 어느 누구의 현장 접근도 허용하지 않기에 감식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어떨까? 만에 하나 진상규명이 미궁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아니, 진상규명 결과 철거민의 화염병 투척 때문에 불이 났다고 결론 나면 어떻게 될까?

유의해서 보자. 한나라당은 진상 규명 이전에 정치적 문책부터 해야 한다는 홍준표 원내대표의 주장을 누르고 ‘선 진상규명’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박희태 대표는 진상조사를 검찰에 맡기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국회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주장과는 달리 검찰 단독조사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참고로 검찰은 검사 7명과 수사관 13명으로 구성된 ‘메머드급’ 수사팀을 초스피드로 꾸렸다).

경찰의 진압은 누가 봐도 명백한 ‘과잉’이지만 이 ‘과잉’에 내려질 사법적 단죄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단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진 제공=오마이뉴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