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기 이전에 이미 엄마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의 실종을 계기로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었음을 뻐아프게 깨닫는다.” - 정홍수, 「피에타, 그 영원한 귀환」,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1. ‘바보 엄마’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 이름 석자 뒤에 붙는 별명은 전투적이다. ‘승부사’라는 닉네임이 그렇고, 그 닉네임에 붙는 ‘냉철’ ‘뚝심’ 등의 수식어가 그렇다. 이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행적에 새겨진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하지만 다르다. 국민과의 접촉면에서 내보인 그의 면모는 사뭇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과 대비해도 전혀 다르다. 대국민 접촉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의 비교 속에서 부각되는 그의 이미지는 (흔히 말하는) 여성적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다스런’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열린우리당원과 국민에게 편지를 쓰던 사람, 품격을 팽개치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던 사람, 때론 ‘내 편’을 지키기 위해 ‘네 편’에게 삿대질을 하던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어설픈 통기타 솜씨에 의지해 ‘상록수’를 멋없이 부르던 사람, 종교가 뭐냐는 추기경의 질문에 눈을 내리깔고 ‘나이롱’ 신자임을 고백하던 사람, 가슴이 답답하면 비서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우던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던한’ 사람이었다. 지난 행적을 꼬투리 잡아 공격을 가하던 검사에게 뒤끝을 보이지 않은 사람, 상대편이 ‘정신병자’ 운운해도 그냥 웃고만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 탓’이 국민 스포츠가 되었어도 천장 한 번 올려다보며 한숨만 내쉰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사람으로 비쳐졌다. 끌어안는 사람, 바로 ‘엄마’였다. 때론 그악스럽게, 때론 호들갑 떨면서, 그러면서도 가족을 챙겨주는, 그래서 그의 존재가 귀찮고 짜증나면서도 당연시됐던 ‘보통 엄마’였고 ‘바보 엄마’였다.

2. ‘모진 아버지’ 이명박

이명박 대통령은 ‘독선적인’ 사람이다. 자수성가 신화를 읊조리면서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사람, 그렇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정당성을 앞세워 순종을 강요하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모진’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계율로 다스리는 사람, 반항하는 자식에게 회초리를 드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편애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호오에 따라 애증을 여과없이 내보이는 사람, 직업과 성적에 따라 상벌을 엄연히 구분하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사람으로 비친다. 내치는 사람, 바로 ‘아버지’다. 행여 온화한 모습을 보여도 그 뒤로 엄한 시선을 감춘 사람, 그러면서도 권위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 그는 ‘가부장’이고 ‘모진 아버지’다.

3. ‘모진 아버지’의 핍박과 ‘바보 엄마’의 설움

출발이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같은 신화에 기대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빈곤한 가정환경, 자수성가한 경력,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던 이력 등을 무기 삼아 대권을 손에 쥔 사람들이다.

과정도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혁’의 열망을 안고, 이명박 대통령은 ‘성장’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이 됐지만 얼마 못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통령 탓’을 ‘고스톱’에 필적할 만한 국민스포츠로 만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르다. 스타일이 다르고 이미지가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끌어안는 스타일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내치는 스타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보 엄마’의 이미지로 남았고, 이명박 대통령은 ‘모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민심을 ‘盧추모-反MB’로 흐르게 한 근원이다.

여기에 살아있는 권력의 무리한 수사와 죽은 권력의 인간적 고뇌가 ‘모진 아버지’의 핍박과 ‘바보 엄마’의 설움으로 묘사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을 민심의 저울 위로 올리게 한 것이다.

▶국민여론조사 - 검찰의 ‘노무현 수사’에 대해
‘검찰수사가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잘못은 없는지 그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 60.0% : ‘법절차에 따른 정당한 검찰권 행사였으므로 별도의 책임규명은 불필요하다’ 34.7%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5월 25일 조사

4.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

움직이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저주를 퍼부은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통분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인에 대한 정서를 바꾸지 않고 정치적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이들은 상수다.

움직이는 건 부동층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었다가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사람들이 수시로 움직이면서 국면을 열고 정국을 좌우한다. 이들의 선택에 따라 국민 여론의 향배가 달라지고 정당 지지도가 춤을 춘다. 이들은 변수다. 캐스팅 보트권을 쥔 결정적 변수다.

이들은 이중적이다. 2008년엔 촛불을 들었고, 2009년엔 향불을 피웠지만 같은 해 벌어진 총선에선 뉴타운에 열광했고 용산참사에 냉담했다. 민주 의제엔 호응했지만 민중 의제엔 불응했다.

이들의 이중성은 하나의 가치에서 나온다. 바로 자유다. 이들은 극심한 경쟁체제에 순응하면서 능력을 키우려 하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한다. 그래서 국가는 기회를 제공하고 통제를 제어하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여건만 만들면 된다고 믿는다.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능력에 맡기면 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적 통제(교육과 부동산)에 반발했고 이명박 정부의 정치사회적 통제(표현의 자유)를 거부한다.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反MB’로 기운 것은 필연이다. ‘747’로 대변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장을 열어줄 것이라던 믿음이 깨진 상태에서 광장 봉쇄로 상징되는 공안 회귀가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마저 앗아간다고 판단하면서 이들은 불만을 키워왔다.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장이 줄어드는 상태에서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여겼던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마저 위축되니까 반발한 것이다. 이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상실과 퇴행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계기였다.

5. ‘모진 아버지’의 ‘엄마’ 되기

중도강화·친서민으로 집약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은 ‘엄마’ 되기다. ‘모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어진 엄마’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화장이요 이벤트다.

‘스킨십’을 강화하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서울 이문동 골목시장을 찾고 원주 마이스터고를 찾아 ‘엄마’의 손길을 연출하려고 한다.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엄마’의 눈길을 연출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또 다시 ‘소싯적’을 자랑해 탈을 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무차별’을 강조하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떢복이집·슈퍼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보육원의 아이를 들어올리고, 마이스터고 학생들과 ‘짬밥’을 푸는 모습을 통해 차별없는 애정을 강조하려고 한다. 능력·지위를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엄마’의 무차별적 사랑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 전에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면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보살핌’을 부각시키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사교육 근절을 다짐하고, 청년실업을 근심하는 모습을 통해 자애로운 보살핌을 부각시키려 한다.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무한대 사랑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서 학원심야교습 금지를 놓고 오락가락하면서 날림정책을 노출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강화·친서민은 청와대가 말하는 것처럼 ‘MB다움’의 회복이 아니다. 그건 ‘노무현스러움’의 모방이다.

6. ‘엄마’ 되기는 성공할까?

성공할 수 없다. 앞 다르고 뒤 다른 언행 때문만이 아니다. 부응할 수 없다. 부동층의 2가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다.

‘자유로운 이익추구’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올려야 한다. 바닥에서 맴도는 경기를 끌어 올려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기약이 없다.

‘자유로운 의사표현’ 요구는 오히려 억압한다. 미디어법 처리를 강행하려 하고, 사이버 모욕죄 도입을 다그치고, 시국선언 한 전교조를 압수수색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토끼’인 보수층이 떠나간다. 그러면 ‘산토끼’를 잡아봤자 별무소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외길로 달린다. 이게 문제가 된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억압하는 행태가 ‘모진 아버지’의 ‘엄마’ 되기를 가로막는다. 회초리 든 손을 뒤로 숨긴 채 다른 한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인식케 한다.

▶국민여론조사 -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행보에 대해
‘기대 안돼’ 55% : ‘기대 돼’ 37%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6월 29일 조사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은 유동적이다. 민심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反MB’ 정서가 2007년 대선과 같은 ‘반발성 투표행위’를 낳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개별적이란 게 문제다. ‘盧추모’도 ‘反MB’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개인에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다.

‘盧추모’ 정서가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깜짝 반등은 반짝 효과였을 뿐이다. 민주당의 지지율은 다시 내려간다. 왜일까? 별개로 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별개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잊지 않는다. 2002년 대선 때 자기들이 뽑은 대선 후보를 제치고 정몽준 후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던 구 민주당의 행태를, 참여정부 때 당과 청와대가 분리돼 따로 놀았던 과정을, 참여정부 이후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거리를 뒀던 전력을, 그리고 지금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도했고 목도하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별개로 본다.

‘反MB’ 정서가 표심을 한나라당에서 이탈시킬 것이라고 보는 건 속단이다. 4.29재보선 때처럼 잠시 동안의, 부분적인 이탈은 나타날 수 있지만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이탈을 예단하기는 힘들다.

박근혜 전 대표가 버티고 서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아류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갈등관계를 빚는 동렬의 정치인으로 대기하고 있다. 바로 이 박근혜 요인이 완충역할을 한다. 박근혜 요인이 ‘反MB’ 정서가 한나라당으로 확산되는 걸 차단하고, ‘反MB’의 반사이익이 민주당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다. 여차하면 한나라당이 이명박 대통령을 버림으로써 ‘反MB’ 정서로부터 탈출할 여지를 만든다.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그렇게 작용할 여지를 축적한다.

▶국민여론조사 - 대통령과 정당 지지도

                       4월 18일       5월 25일       6월 22일 
이명박               32.7%           27.4%          25.3%
한나라당            31.4%           21.5%          23.3%
민주당               13.0%           20.8%          20.7%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

8. 그러면…

‘盧추모’는 ‘촛불’을 밝히지 않고, ‘反MB’는 탄핵 카드를 꺼내지 않는다. ‘盧추모’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꺼리고 ‘反MB’가 파국상황을 부르는 걸 경계한다. 그 대신 개인적으로 행동한다. 개인적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개인적으로 MB비판 댓글을 단다. 민주당에도, 진보정당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주목할 현상이다. 민심이 ‘민주주의 위기’를 우려하고 ‘소통’ 요구를 쏟아내면서도 反MB 민주전선 구축에 나서는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민심이 말하는 건 이런 것이다.

국민에게 ‘민주’는 채권이다. 돌려받지 못한, 떼일 위기에 놓인 채권이다. 그래서 돌려받으려 한다. 하지만 돌려받지 못한다. 사채업자처럼 조폭을 동원할 게 아니기에 어떤 방도를 강구해야 할지 몰라 발을 구르고 있다. ‘싸움의 기술’을 알려달라고, ‘투쟁의 비전’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채권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이문이 남는 건 아니다. 채권을 돌려받아봤자 본전치기일 뿐이다. 국민은 플러스알파를 원한다. 본전치기에 이문내기를 추가하려고 한다. 약탈하는 것도 싫지만 빼앗기는 것도 싫기에 성장하면서도 분배를 이루는 전략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략과 방도를 국민 앞에 내놔야 한다. ‘반대하는 민주’가 아니라 ‘제시하는 민주’, ‘구호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생활상의 진보’를 내놔야 한다.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니 진보니 하는 구분법도, 민주당이니 진보정당이니 하는 구별법도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당에서 ‘진보’의 여지를 끌어내고, 진보정당에서 ‘구체’의 내용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민주당은 대장간에 가 담금질을 받아야 하고, 진보정당은 저잣거리에 나가 세상물정을 배워야 한다.

연대는 고안되는 것도, 기획되는 것도 아니다. 저잣거리에서 국민들에 의해 담금질 되면서 숙성되는 것, 밑에서 끊임없이 부대끼면서 ‘민주’의 실천력을 배가시키고 ‘진보’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 이게 바로 연대다.

▶국민여론조사 - ‘2010 지방선거에서 범야권 단일후보가 나온다면 지지할 의향이 있는가’
‘지지하겠다’ 48.1% : ‘지지하지 않겠다’ 36.4%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6월 22일 조사

※이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를 맞아 ‘광장’ ‘코리아연구원’ 등이 오늘(7일) 오전 9시 30분부터 공동개최하는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그 과제’ 심포지엄의 발표문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토씨'

민주당이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 오바마가 마치 한국 민주당 당원이라도 되는 양 들떠있다. 그래서 우습다. 오바마와 자신의 공통된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만큼이나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최재성 대변인이 말했다. “무능한 보수의 시대가 일단락되고 진보로의 변화가 시작됐다”고 했다. 김효석 민주정책연구원장이 말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오바마 당선이 (한국의)민주당에 여러 메시지를 주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형식상 큰 문제는 없다. 오바마 당선에 투영된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의 민주당과 한국의 민주당을 등치시키고 오바마의 ‘진보’와 한국 민주당의 ‘진보’를 같은 반열에 놓고 선전전을 펼치는 것이라면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전인수와 견강부회와 자가당착이 두루 뒤섞인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 당직자가 ‘진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는 것부터가 낯설다. 그동안 말해오지 않았던가. 민주당은 중도실용정당이라고, 탈이념․실용의 시대에 맞게 오른쪽으로 반클릭 이동해 중도개혁노선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민주당이 느닷없이 ‘진보’를 운위한다. 참으로 생경하다.

뭐 좋다. ‘중도실용’이나 ‘진보’나 모두 무정형의 개념 아니냐고, 표현만 달랐지 내용은 같다고 우기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것도 좋다. 비록 어제까지는 ‘중도실용’을 추구했으나 오바마의 당선을 보면서 ‘진보’의 가치를 재발견했노라고 고백하면 굳이 토를 달 수 없다.

묻고 싶다. 민주당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진보’의 내용이 뭐냐고, 한국에 구현해야 할 ‘진보’의 가치는 어떤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거냐고 묻고 싶다.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표방하는 ‘진보’의 구체적 징표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모호한 억대의 자금을 수수한 최고위원을 보위하기 위해 단호하고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서민을 홀대하는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뜨뜻미지근하게 대처하는 민주당의 모습에서 ‘진보’의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책과 사안에 백화점식으로 비판을 하면서도 무엇 하나 딱 집어 화력을 집중하고 성과를 일궈내는 '선명야당'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충고하고 싶다. 발밑을 쳐다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오바마의 가치와 노선이 ‘진보’에 해당하는지는 좀 더 두고 지켜볼 일이니까 논외로 하겠다. 다만 이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미국 사회의 약자인 유색인종과 여성, 젊은층이 오바마에 열광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유색인종으로 태어나 인종 차별의 설움을 겪고, 그것이 바탕이 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역활동을 일관되게 펼쳐온 오바마의 인생이력과 활동경력이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부르짖는 구호에 진정성과 실천의지가 담겼다고 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대 최대의 선거자금을 모아주고,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운집한 것이다.

민주당은 어떤가? 다수의 국민이 이명박 정부 정책이 1%만을 위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도 민주당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정책의 잘못을 민주당이 바로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대담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엔 이게 없다. 다수의 국민이 ‘야성 회복’을 강력히 주문하는데도 ‘실용’과 '대안‘ 이미지에 현혹돼 엉거주춤 자세를 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대로다. 민주당의 지지율은 대선 때나 지금이나 요지부동이다. 15% 안팎에서 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있는 미국만 쳐다볼 일이 아니다. 발 밑이 파이고 도끼자루가 썩는 자기 처지를 살필 일이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진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 ‘진보’가 부단한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을 통해서 정립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ps. 코미디 같은 정치 현상이 하나 더 있다. 오바마 당선 이후 보이는 386정치인들의 행태다. 여당의 어떤 386정치인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고, 야당의 어떤 386 정치인은 스스로 ‘한국의 오바마’라 칭한다. 여야를 불문하고 대다수 386정치인들이 정치의 세대교체, 새로운 리더십을 주창한다.

할 말이 참 많지만 관두련다. 그렇게 자화자찬하는 386정치인들이 새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아니면 기존 정치질서에 자발적으로 편입됐는지는 얼추 평가가 이뤄진 상태다.

과오와 실패를 거름 삼아 새롭게 모색해 보려 한다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세대가 같다는 이유로 오바마에 자신을 끼워팔려는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건 새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구악’이다.

▲사진 = 민주당 민주정책연구원이 6일 주최한 정책포럼 장면 ⓒ민주당 홈페이지


Posted by '토씨'

1.

왜 블로그 활동을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좋아서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미디어의 틀에 구속되지 않고 여러 형태의 글쓰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달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득을 거머쥡니다. '발견'입니다.

저의 부족한 표현력, 짧은 생각, 엉성한 구성을 발견합니다. 깊이 숙고하고 여러 번 퇴고를 해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발견합니다. 글 밑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서 발견합니다. 저의 부족한 표현력, 짧은 생각, 엉성한 구성을 질타하는 댓글을 보면서 '야성적인 지성'을 발견합니다. 당사자의 항변성 논리도 아니고 전문가의 학자연한 고견도 아닌 자연상태의 '나안'을 발견합니다. 이게 민심이고 이게 여론이다 싶은 생각을 합니다. 이게 가장 정확한 시각이다 싶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반갑고 뿌듯합니다. 그리고 배웁니다.

2.

'몰락한 386'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부적절한 단어, 세밀하지 못한 분류, 정교하지 않은 규정이 어김없이 걸러지는 걸 보면서 '보론'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원문을 보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현 시국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확인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를 끝까지 파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제 눈길을 사로잡은 댓글 두 구절이 있었습니다.

'속상해서' 님이 그랬습니다. '분노'는 "무력감의 다른 형태"라고 했습니다. 절절이 와 닿는 표현이었습니다.

얼마 전 다른 글('맥빠지는 선거, 서성이는 표심')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표심이 서성이고 있다고,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고 의지할 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총선 투표율이 극히 낮을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그 원인을 여기서 찾았습니다.

'속상해서' 님의 지적에 따르면 범위가 확장됩니다. 노무현 후보 지지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로 입장을 바꾼 상당수 유권자도 넓게 보면 방황하는 유권자입니다. 분노가 무력감, 즉 체념으로 이어진 겁니다.

문제는 원인이었습니다. 분노한 이유가 뭔지를 규명해야 했습니다. 민주당이 놓치고 있는 게 바로 이 문제라고 봤습니다. 그 한 가운데 386이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이념 대 민생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선택적 해법을 찾아선 안 됐습니다. 꼭 이 두 개념을 갖고 풀어야 한다면 이래야 했습니다. 민생 해결을 위한 이념적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진보적 입장에서 민생 해법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민주당과 386은 그걸 놓쳤습니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해법을 컨닝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민주당의 '정체성' 문제였습니다.

진보는 무정형의 개념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제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게 바로 진보의 태도입니다. 진보의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맞춰 진보의 스펙트럼 또한 끊임없이 조절돼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당과 386의원은 이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부정확했습니다. 386의 몰락 이유를 진단하면서 정밀하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a' 님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386정치인의 실패는 자기정체성의 진화에 실패(한 것)"이라는 'a'님의 표현이 가장 분명하고 예리한 것입니다. 진화에 실패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진보의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4.

단순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말하렵니다.

IMF환란 10년을 거치면서 중산층이 몰락했습니다. 재산과 소득, 교육과 여가 모든 면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객관적 형세만 놓고 보면 '진보에의 요구'는 점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계급 투표'의 여지는 넓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 지형은 보수 일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정치 세력이 '진보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니까 유권자가 체념했고 이 체념이 복고적 투표성향을 낳고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 균형이 깨지고 있고 이념의 긴장관계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박합니다. 다시 균형 관계를 잡는 게 시급합니다.

하지만 멀어 보입니다. 총선에서 살아남은 민주당 인사들의 면면이 그렇습니다. 386보다 더 '과거'와 '보수'로 경도돼 있습니다.

5.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언론이 분류합니다. 보수 대 진보로 분류하고, 진보의 한 축으로 민주당을 놓습니다. 과연 옳은 분류일까요?

진보를 상대적 개념으로 쓰는 거라면 굳이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민주당은 진보가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중도'를 표방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두 개의 물음표가 찍힙니다.

386은 왜 '중도' 민주당에 기거한 걸까요? 스스로 진보와 혁신을 주장하던 386이 '중도'에 몸을 실은 이유가 뭘까요? 현실 때문일까요? 이른바 원조 진보는 아직 성숙돼 있지 않아 개혁의 주도권을 쥘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중도' 민주당을 숙주로 삼은 걸까요? 그렇다면 386의 몰락을 '기생 부화'가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최종 판정해도 되는 걸까요?

이른바 원조 진보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민노당의 의석수는 반토막이 났고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으로 밀려났습니다. 유권자는 왜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은 걸까요? 왜 원조 진보는 '진보에의 요구'를 세력화하지 못한 걸까요?

발제하는 걸로 만족해야 겠네요. 짧은 필설로 담아내기엔 너무 큰 담론입니다. 고민과 반성, 그리고 인고의 나날을 보낸 다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길게 보고 느긋하게 대처할 일도 아닙니다. 이 두 물음에 답을 내놓지 못하면 '서성이는 표심'에 거처를 제공할 수 없고, '체념하는 표심'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여러분의 '나안'과 '지성'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토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마이뉴스

심상정 의원은 탈당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뭘 고민하는 걸까?

면구스러운 걸까? 혁신안이 당 대회에 상정되기도 전에 탈당해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만든 사람들과 즉각 결합하는 게 면구스러운 걸까? 자신이 비대위 대표로 있을 때 비판했던 이들의 행태에 곧장 동조하는 게 낯간지러운 걸까?

아니면 민노당에 미련이 남은 걸까? 비록 혁신안이 부결됐지만 그래도 혁신의 여지는 남아있다고 믿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제3의 길을 고민하는 걸까? ‘새로운 진보정당운동’도 민노당도 아닌 제3의 진보정당을 꿈꾸는 걸까?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과속 행태’를 비판하면서 제3의 진보정당 창당을 주장하는 일부 평등파 인사들과 뜻을 같이 하려는 걸까?

설 연휴 동안 숙고한 다음에 입장을 밝힌다고 하니 기다려 볼 일이지만 속내를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는 단서는 있다. 태도와 현상이다.

‘일심회’ 제명을 추진하면서도 ‘종북주의’ 비판을 과도하다고 견제했던 그다. 이런 태도를 두고 일각에서는 절충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양 극단을 제거함으로써 ‘대동’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분열 방지다.

하지만 현상은 분열로 치닫고 있다. 민노당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전농, 전빈련 등이 입장을 달리 하고 있다. 대중조직별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만이 아니다. 조직 내에서 민노당 분열상을 재연할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면 갈기갈기 찢긴다. 조직이 갈리고, 힘은 분산되고, 정국 대응력은 약화된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분열을 막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이 무산됐다고 해서 특정 분열세력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색하다. 몸을 함부로 움직이면 대중조직의 분열상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때도 좋지 않다. 이명박 당선자는 민주노총과 각을 세우고 있다. 한미FTA 비준안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총력 대응’을 해도 모자랄 판에 조직이 찢기고 대중운동이 갈리면 만신창이가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길게 보고 새로운 진보세력을 건설해야 한다고 훈수를 둔다. 맞는 얘기지만 한편으론 한가한 소리다. 깨지고 터지면 패배주의가 유포된다.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건 비전과 전략을 가졌을 때의 얘기다.

‘숙고’는 자연현상에 가깝다. 상층부 몇몇만의 조직 결성으로 진보세력의 대안이 건설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대중운동을 조직화하는 건 고사하고 기존 대중조직마저 분열된다면 어떤 진보정당을 만들더라도 힘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중시한다면 섣불리 길을 잡을 수 없다.

심상정 의원의 어깨 너머로 얼핏 살핀 게 틀리지 않다면 ‘조속한 결론’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그는 그 어떤 카드도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숙고 다음의 일성을 기다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모든 이들이 무릎을 딱 칠 묘안을 제시할 깜냥이 되지 않는 한….

Posted by '토씨'

유시민 의원이 통합신당을 탈당했다. "통합신당엔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나 좁아 보인다"며 "유연한 진보노선을 가진 '좋은 정당'이 필요"해 탈당한다고 했다.

안희정 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진보개혁세력의 새로운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통합신당에 남았다.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너무나 좁아 보이는" 통합신당에서도 '진보' 외침이 나온다. 손학규 대표가 '새로운 진보'를 주창한다.

'잔류'와 '이탈'로 행동은 갈리는 데 말은 같다. 모두가 '진보'를 부르짖는다.

이상하게 볼 일만은 아니다. 쓰는 단어는 똑같은데 거기에 담는 의미가 다른 경우는 주변에 널려있다. '붉은색'에도 '빨간색'이 있고 '벌건색'이 있다. 진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공교롭다. 이렇게 치부하려고 했는데 실상이 그렇지가 않다.

유시민 의원이 그랬다. 당신이 말하는 '유연한 진보'의 실체가 뭐냐는 질문에 "한미FTA와 사회투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정책노선이 21세기형 유연한 진보노선"이라고 답했다. 안희정 씨도 말했다. '진보개혁세력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한미FTA와 파병과 같은 핵심 의제들에서 "어느 정도 타협할 것인가 하는 정치망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손학규 대표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가 그랬다. "한미 FTA 비준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는 취지에 백번 공감한다"고 했다.

'원조 진보'를 자처하는 민노당은 한미FTA와 그 저변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이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고 주장한다. 민노당의 이런 구분법에 따르면 유시민·안희정·손학규는 같다. 신자유주의를 인정하고 부작용을 보완하자고 한다.

그런데도 서로 삿대질을 한다. 삿대질을 하다못해 한쪽은 짐을 싸고 다른 한쪽은 수수방관한다. 왜 그럴까?

교육이나 부동산 문제에서 해법차가 존재하긴 한다. 유시민·안희정 씨의 뿌리에 해당하는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동산 정책을 비판해온 사람이 손학규 대표다.

하지만 이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 사람 모두 '진보'라는 거대 담론을 꺼내든 것이 진정이라면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는 작은 가치다. 부동산 문제는 벌써 통합신당이 방향을 선회한 상태다.

어차피 큰 방향은 '시장경제 시스템의 인정(유시민)' 아닌가. 이 큰 방향이 같다면 나머지는 '타협(안희정)'을 통해 풀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틈을 벌리려 해도 기껏해야 가재와 게의 차이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

다른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안희정 씨가 '타협의 정치망'을 강조할 때 유시민 의원은 다른 말을 했다. "(통합신당에는)노선 경쟁을 할 수 있는 정상적 의사결정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당원 범위가 확정돼 있지 않고, 전당대회를 열어 노선 경쟁하려면 당이 파멸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들기도 했다. 이것이 '잔류'와 '이탈'의 행동양식을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시민 의원이 탈당해 만들고자 하는 '좋은 정당'은 장기과제다. 본인 스스로 5년을 두고 차근히 풀어갈 과제라고 했다.

이런 자세라면 통합신당의 의사결정구조를 탈당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 통합신당이 급조됐고, 당내 노선 갈등을 봉합한 건 맞다. 하지만 이건 한시적이다. 발등의 불로 떨어진 총선을 치르기 위한 조치다. 어차피 총선이 끝나면 대대적인 체제·노선 정비는 불가피하다.

길게 보려 한다는 말이 진정이라면 기다리는 게 논리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일관성이 있다. 어차피 불거질 체제·노선 재정비 과정에서 자신의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게 일관된 태도다.

일관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손학규 대표의 태도도 크게 나을 바 없다. 충북지역 의원 8명을 만나 설득했다. 탈당하지 말라고, 자유신당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노선도 정책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당선 가능성만을 보고 당적을 옮기려는 의원들에게 호소한 손학규 대표가 유시민 의원 탈당은 수수방관했다.

같은 '갑각류'인 유시민 의원의 탈당은 수수방관하면서 종이 다른 '무척추' 의원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손학규 대표의 태도에서 일관성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빈소리'다. 유시민 의원이나 손학규 대표가 외치는 '진보'는 모두가 '빈소리'다. 아무리 좋게 봐도 정치적 레토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사이를 가르는 건 노선이 아니라 정서와 계산이다. '노무현의 때'를 벗겨내야 자기가 산다고 믿고, '굴러온 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오기를 내보이고 있다. 총선 이후 전개될 세력 재편과정에서 거점을 확보하려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이 집중하는 건 '반성적 모색'이 아니라 '공학적 생존'이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