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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씨의 유서와 신정아 씨의 책은 같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제 입으로 고백했다는 점에선 같다. 하지만 다르다. 외양은 같을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감도는 다를 수 있다. ‘고백’의 동기가 다를 수 있기에 읽는 ‘독서’의 감도 또한 다를 수 있다.

장자연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고백했다. 그래서 추구하지 않는다. 고백에 대한 보상으로 유형 또는 무형의 이익이 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는다. 신정아 씨는 새 출발을 하려고 출간했다. 그래서 추구할 수 있다. 자전에세이 ‘4001’이 자신의 새 출발에 물질적이든 정서적이든 도움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장자연 씨는 자기를 '버리면서' 유서를 남겼을 수 있고, 신정아 씨는 자기를 '위해' 책을 출간했을 수 있다.

이 같은 차이는 평가의 차이로 이어진다. 장자연 씨가 밝힌 ‘직접 겪은 일’의 객관성과 신정아 씨가 밝힌 ‘직접 겪은 일’의 객관성에 대한 평가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물론 위험한 지적이다. 이 같은 지적은 달을 바라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일과 같기에 본말을 전도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지적을 억누르지 못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크게 두 가지다. 신정아 씨가 밝힌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이다.

신정아 씨는 정운찬 위원장이 서울대 총장으로 있을 때 자신에게 미술관 관장직과 교수직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함께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가끔씩 자신에게 크고 작은 코멘트를 들어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선뜻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시스템을 감안하면 그렇다.

제아무리 총장이라 해도 관장직과 교수직을 제 맘대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교수직은 해당 학과 교수들의 추천과 단과대학의 심사를 거쳐 총장 결재를 받아 결정된다. 설립자와 재단의 입김이 센 사립대에서조차 이 같은 임용절차는 형식적으로라도 지킨다. 그런데 국립 서울대의 총장이 사실상 ‘낙하산’ 교수 임용을 감행하려 했다고? 그것도 자기 전공 분야와는 거리가 먼 학과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코멘트 부탁’도 그렇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을 했을 때 청와대 ‘밖’의 의견을 청취하는 건 일반적인 관행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정무 파트에서 여론조사를 돌리거나 홍보 파트에서 모니터링을 한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수시로 미술계 인사에게 코멘트를 부탁했다고? 그것도 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는 대통령이 일부러 연락을 취해서?

그래서 배제하지 못한다. 신정아 씨가 자기 본위로 상황을 이해해 실상과 맥락이 다른 주장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물론 인정한다. 이 같은 의문이 정황에 기댄 '상식적 문제제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부분에 대한 의문이 전체에 대한 부정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인정한다. 이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신정아 씨의 주장에 상당한 사실이 포함됐을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해석이 다를지언정 행위는 있었을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정아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검증이 끝나고 나서다. 상황과 사실이 신정아 씨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돼 전달됐을 가능성, 그리고 그런 가능성이 스며있는 부분을 가려낸 다음에 인정해도 늦지 않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사실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사실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지금은 곧이곧대로 믿고, 마구잡이로 받아적을 때가 아니다. 

▲사진=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신정아 씨 ⓒ프레시안

Posted by '토씨'

#1

어제 선배 몇 분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젓가락질 사이로 이런저런 얘기가 쉴새없이 섞여 나왔죠.

한 선배가 말하더군요. 요즘 자괴감을 느낀다고…. 좀 뜨악했습니다. 자괴감을 느낀다는 선배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거든요.

귀를 기울였습니다. 웃음과 자괴감의 부조화를 해소시킬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얘기를 듣곤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삼성의 이른바 '떡값'도 받지 못하고, 신정아 씨의 명품 선물도 받지 못하는 자기 신세가 처량하다고 하더군요. 언감생심,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아무리 자기 급이 낮아도 그렇지 에버랜드 입장권 한 장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농담이었습니다. 이른바 '바보 시리즈'를 재생한, 아주 식상한 썰렁 개그였습니다.

60년대에나 통했을 법한 이런 썰렁 개그가 첨단시대라는 지금에도 어김없이 유행합니다. 비리사건이 터지고 로비 리스트가 나오고 '떡값'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나한테는 안 보낸 거야?"

이 썰렁 개그엔 냉담한 시선이 깔려있습니다. 세월이 가고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비리 사슬, 로비 커넥션에 대한 염증이 '동승 욕구'라는 전도된 형태로 표출됩니다. 일종의 좌절감과 적대감의 역설적 표현인 셈이겠죠.

#2

점심 식사 자리를 파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비껴 달리는 지하철인지라 곳곳에 빈자리를 남겨뒀더군요.

맞은편 승객을 쳐다보기가 민망해 천장을 올려보다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삼성의 이른바 '떡값'과 신정아 씨의 명품 선물은 급이 같은 건가? 몇몇 기업에서 돈을 받았다는 변양균 씨와 명절 때마다 삼성 돈을 받았다는 정관계 인사들은 동급인가?

두 경우 모두 사법부의 판결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뭐라 말할 수는 없겠죠. 한쪽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다른 한쪽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돈과 선물을 전달했다고 하니 급이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 또한 아직 입에 담을 단계는 아닙니다.

법 논리는 법률 전문가들이 알아서 챙길 테니까 여기선 상식만 갖고 얘기하렵니다. 어쨌든 양쪽 모두 '잘 봐달라'는 뜻으로 돈과 선물을 건넸다면 급은 몰라도 성질은 같은 것이겠죠.

그래서 의아합니다. 신정아 씨 사건이 터졌을 때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연일 대서특필했고, 어떤 언론은 마치 '권력형 비리'의 단서라도 잡은 양 신정아 씨의 알몸 사진까지 실었습니다.

이렇게 뜨거웠던 언론이 싸늘히 굳어 버렸습니다.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나에게도 삼성 돈이 전달됐다"며 증거 사진까지 제시했는데도 구겨버립니다. 신문 서너 쪽을 건너 뛰어 정치면 한 귀퉁이에 상자 기사로 박아버립니다. 사진도 싣지 않습니다. 상자 기사 위로는 대선에 골몰하는 정치권의 소식을 차곡차곡 쌓습니다. 오늘 신문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열정이 냉정으로 급변한 이유가 뭘까요? 많은 사람이 한 마디씩 합니다. 자기들도 받았으니까 뒤가 구려서, 광고를 의식해서, 판을 키우면 대선에 영향을 미칠까봐 등등 나름의 분석을 내놓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내칠 수 없는 분석입니다. 그래서 더 씁쓸합니다. '보고 싶은 만큼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언제부터 진실이 이렇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걸까요?

우리 언론에게 진실은 보고 싶을 때만 보는 만화나 영화 같은 것인가 봅니다.

Posted by '토씨'

변양균․신정아 씨가 법정에 섰다. 첫 공판이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춘 듯 같은 말을 했다.

변양균 - 구치소에서 매일 반성과 참회를 하고 있다.

신정아 - 잘못된 판단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살겠다.

두 사람 모두 참회한다고 했다. 그런데 희한하다. 죄가 뭔지를 모른다고 했다.

변양균 씨의 변호인은 “변 씨가 사실관계는 인정했으나 그게 과연 죄가 되느냐고 문제제기를 했다”고 전했다. 신정아 씨의 변호인 역시 학력 위조 외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이 성곡미술관에 후원금을 낸 것은 신 씨가 노력한 결과”라고 했다.

참회하는데 죄는 없다고 한다. 죄는 짓지 않았지만 참회한다고 한다. 이율배반이다. 참회는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행위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참회할 이유는 없다.

‘꺼리’가 없는 건 아니다. 변양균 씨가 말한 게 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국민께 너무 죄송하다. 대통령을 비롯해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들에게 엄청난 누를 끼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른바 ‘내 탓이오’ 논리다. 비록 지은 죄는 없지만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동료들에게 누를 끼친 게 미안하다는 주장이다. ‘도의적 책임’을 거론한 셈이다.

그래도 맞지 않는다. 변 씨와 신 씨가 선 곳은 법정이다. 실정법 위반 ‘사실’을 가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도의’를 거론할 이유는 없다. 거론을 하더라도 ‘사과’하면 될 일이지 ‘참회’할 일은 아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죄가 없다”는 주장과 “참회한다”는 고백을 어떻게 조합해야 하는 걸까?

도출할 수 있는 추론은 딱 하나다. 목적이 일치한다. 두 주장 모두 ‘방어용’이다. “죄가 없다”는 주장은 ‘무죄 방면’을 겨냥한다. “참회한다”는 고백은 ‘양형 축소’를 희망한다.

법원이 양형을 내리는 데 참작하는 사유 가운데 하나가 ‘개전의 정’이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