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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뉴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2/10 시험대 위에 선 MBC (4)
  2. 2009/06/26 헛심 쓴 '동아일보', 헛물만 켰다 (23)
  3. 2008/07/18 MB는 '청타'와 '대자보'를 알까? (18)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MBC는 시험대 위에 섰다.

방송문화진흥회를 향해 쌍심지를 켜는 것만으로는 다가올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사장의 인사권을 침해해 결과적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원칙을 훼손한 점에서, 그 배면에 방송 장악 또는 길들이기 의도가 깔린 점에서 방문진을 비판하는 건 타당하지만 이것만이 실천적 대안인 것은 아니다.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절대 되돌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엄기영 사장이 최종적으로 ‘사퇴’ 모양새를 취한 점도 이런 전망을 강화한다. 그의 ‘사퇴’가 ‘되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방문진 입맛과 정권 코드에 맞는 인물이 사장 자리에 앉아 ‘방문진표’ 본부장들과 함께 MBC 장악에 나서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MBC의 한 기자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각 본부장들은 자기 뜻에 맞는 부장과 팀장 인사를 단행할 것”이라며 “사람이 바뀌면 내용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라고(‘한겨레’ 9일자 보도). MBC가 오르는 시험대가 바로 이것이다. 방송의 ‘공영성’과 ‘독립성’이 하나 둘 소리 소문 없이 스러지는 상황 말이다.

KBS에서 확인한 바 있다. ‘땡전뉴스’ 데스크로 기능해 시청료납부거부운동의 대상이 됐던 KBS가 변신했다는 믿음, 비로소 공영방송으로 거듭났다는 믿음이 어설픈 것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숱한 ‘하차’와 ‘편파’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작일선에 있는 기자와 PD가 변변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공영의 기초가 부실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젠 MBC 차례다. MBC에서는 공영의 기초가 얼마나 튼실한지를 잴 차례가 됐다.

가능성은 있다. MBC는 KBS와는 조직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조직, 그래서 소통과 응집이 비교적 원활한 조직이 MBC다. 몇 번의 방송독립 투쟁경험이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 MBC다. 난관을 헤치고 나갈 힘이 상대적으로 큰 곳이 바로 MBC다.

외부 요인도 있다. 이명박 정권의 공격 타깃이 된 곳이 MBC다. 지난 2년간 편향 대 공영이라는 구도에 내몰렸던 곳이 MBC다. 그만큼 방송의 공영성과 독립성에 대한 각인효과가 강하게 새겨진 곳이 MBC다. 물러설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 바로 MBC다.

하지만 모른다. 가능성은 그에 맞는 조건을 만나야 현실화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지의 요인을 간과할 수 없다.

제작일선에서 ‘일상투쟁’을 전개해야 할 평사원의 특수성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대부분이 김대중 정부 이후, 더 넓게 잡아도 87년 6월항쟁 이후에 입사했고, 꼭 그만큼 내ㆍ외부의 간섭에서 자유로웠다. 이 같은 특수성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제작 간섭에 대한 ‘자극ㆍ반발지수’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지, ‘면역력’을 키우고 ‘저항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

KBS에 비해서는 작지만 신문사에 비해선 큰 조직 규모 또한 눈에 들어온다. 규모가 클수록 조직은 수직화 되고 실적평가와 인사고과는 빡빡해진다. 규모가 방대할수록 조직은 계통화 되고 직종간 칸막이가 생긴다. 이런 요인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그것이 ‘간섭’의 ‘선명도’를 높일지, ‘개입’의 ‘틈새’를 벌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말할 수 있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 일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MBC노조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방문진표’ 본부장 출근저지투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16일 총파업 찬반투표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MBC구성원들은 시험대를 정면돌파할 각오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사진=MBC 사옥 전경 ⓒMBC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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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인정한다. ‘동아일보’가 품을 적잖이 들인 점은 인정한다.

22년 전 기사를 뒤졌다. 색 바랜 신문에 침을 바르고, 필름통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찾아냈다. 1987년 6월항쟁 전후의 ‘경향신문’ KBS·MBC 보도를 들춰냈다. 정권에 아부했고 시민에 등 돌렸던 세 매체의 과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해한다. ‘동아일보’가 세 매체의 과거사를 들춰낸 이유를 이해한다. 경멸과 냉소를 가득 담아 ‘너희가 언제부터 민주언론 진보언론이었는데?’라고 되묻기 위해서다.

‘동아일보’가 그랬다. 세 매체가 서울광장에서 열렸던 ‘6.10민주회복범국민대회’를 6월항쟁 정신과 연결한 것을 문제 삼으며 “최근 6.10범국민대회와 관련해 민주주의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것은 지난 일을 모른 체하는 행태”라고 했다.


이런 식의 비판은 처음이 아니다. 6월 15일자 ‘황호택 칼럼’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6월 10일만 되면…제철을 만난 듯 지면에 활기가 넘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경향신문’과 KBS·MBC는 ‘관제언론’을 하고 있었던 반면에 ‘동아일보’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과 6월 민주항쟁에서 선두에 서서 붓으로 싸웠다고 했다. 이렇게 “과거사를 들추는 이유는 우리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관제언론’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점한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인정한다. ‘동아일보’가 들춰낸 과거사는 사실에 부합한다. KBS와 MBC는 분명 ‘관제언론’이었다. ‘땡전뉴스’의 첨병으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중에 6월항쟁의 주역이 된 ‘일부 극소수 불온세력’을 성토하는 ‘보도특집’을 방송하곤 했다. ‘경향신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5공 시절에 ‘경향신문’이 전두환 세력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보도를 지속적으로 내놨다는 기록을 찾기는 힘들다. ‘동아일보’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민주언론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의 과거사 들추기를 인정하지 못한다. 동의하지도 않는다.

‘동아일보’는 자충수를 뒀다. 헛심 쓰면서 헛물만 켰다. 두 개의 반문을 끌어내는, 누워 침뱉기식 우를 범했다. 이런 것이다.

첫번째 반문은 ‘그럼 너희는?’ 이다. 그럼 ‘동아일보’의 과거사는 그리 떳떳하냐는 반문이다. 회고 시점을 22년 전에서 일제강점기로 확장하면 ‘친일’ 전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역사학계와 언론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두번째 반문은 ‘그랬던 너희는?’ 이다. 22년 전 민주항쟁의 선봉에 섰던 ‘동아일보’가 지금은 어느 세력의 선봉에 서 있느냐는 반문이다. 각계각층이 민주주의 후퇴 또는 위기를 우려하는 성명을 내놓는데도 ‘동아일보’는 이명박 정부 옹호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이 시민사회와 언론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반박할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반박하고 있다. ‘친일’ 전력 주장은 진실이 아닐 뿐 아니라 시대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공과 과를 두루 아우르지 못한 단견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주주의가 부여한 자유를 좌파세력이 악용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따로 재반박하지는 않으련다. 그래봤자 평행선을 달릴 뿐이니까…. 다만 이 점만 강조하련다. ‘동아일보’가 스스로 내놓은 논란의 해법을 상기하고 환기시키련다.

‘황호택 칼럼’이 그랬다. “어떤 신문의 논조가 옳고 그른지는 독자의 판단과 역사의 평가에 맡기면 (된다)”고 했다. “(일부 언론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점한 것처럼 행세”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도 했다.

이 ‘훈계’를 받들어 ‘동아일보’에 권한다. 스스로 설정한 금도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기를 권고한다. 역사의 평가는 차후의 일이니까 그렇다치고 당대의 독자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고 있는지,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기 바란다. 정말 일부 좌파세력만이 ‘동아일보’를 공격하는지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바란다. ‘동아일보’ 또한 한 때의 영광을 우리고 또 우리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점한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 보기 바란다.

세상사 이치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 나가 “우리 집안은 삼정승 육판서를 배출한 명문가라오”라고 하면 “그래요? 그럼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는데요?”라고 반문하는 게 세상 인심이고 시대 정서다.

▲‘동아일보’ 6월 26일자 기사

Posted by '토씨'

1.
‘청타’를 기억하시나요? 파랑 먹지를 타자기에 끼운 뒤 한 글자 한 글자 치면 글자 부분만 구멍이 뚫리죠. 그 청타 먹지를 등사기에 놓고 밀면 유인물이 나왔습니다. 누런 갱지에 여기저기 잉크 자국이 번진 유인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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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는 기억하실 겁니다. 커다란 전지에 검정 파랑 빨강 매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건물 벽이나 큰 나무판에 붙이곤 했죠.

모두 전두환 시절의 얘기입니다. 언론이 죽어있던 5공 때의 얘기입니다.

2.
그 땐 진보 언론이니 보수 언론이니, 메이저 언론이니 마이너 언론이니 하는 구분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어용’ 또는 ‘관제’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방송은 ‘땡전 뉴스’로 넘쳐났고 신문엔 ‘보도지침’ 재갈이 물려 있었습니다. 방송은 9시 시보가 울리기가 무섭게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신문은 사진 한 장 싣는 일, 기사 크기 정하는 일조차 맘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전두환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따라야 했습니다.

대체 미디어는 없었습니다. 인쇄소엔 형사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불온 문서’를 제작하는지를 사찰했고, 복사집엔 ‘불순한 전단’ 복사가 맡겨지면 신고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타’와 ‘대자보’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알권리를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알권리’를 충족해야 했고, 어느 곳에서도 표현물을 맘대로 제작할 수 없었기에 후미진 곳에서 몰래 타자기를 두드리고 등사기를 밀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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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요즘 돌아가는 꼴이 옛날이야기를 반추하게 하네요.

이러다간 ‘씨’가 마를 것 같습니다. 방송은 국정홍보방송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문은 ‘보수지 카르텔’ 체제로 회귀할 것 같고, 인터넷은 개점휴업 상태로 몰릴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이 그렇습니다. YTN엔 이미 ‘낙하산’이 투하됐습니다. 그 다음은 KBS겠죠. 인사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MBC엔 징계 칼끝이 겨눠져 있습니다.

신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촛불’이 켜지기 전에 이미 문제가 됐죠? 정부 광고나 협찬이 차별적으로 집행된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공방 유탄이 이른바 ‘진보 언론’에까지 튀고 있습니다. 광고주가 몸을 사리면서 광고 집행을 아예 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도 어수선합니다. 방송통신심의위의 제재에 이어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저작권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불법 복제물을 카페나 블로그에 올린 네티즌을 포털이 제재하지 않으면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리고, 과태료를 세 번 받으면 포털 폐쇄까지 가능하게 하는 개정안입니다. 이러면 네티즌의 ‘표현’은 위축됩니다. 정보 접근권이 취약한 네티즌이 기존 언론의 보도물 등에 근거해 입장을 밝히는 행위가 제한되고, 포털은 적극적 감시자로 변모하게 됩니다. 포털이 몸을 사리면 더불어 인터넷 언론도 위축될 겁니다.

4.
여기서 갈라야 겠네요.

과잉해석이 있고 과대망상이 있습니다.

‘씨’가 마를 것이란 전망은 사실 과잉해석입니다. 방송에 재갈이 물리고 신문이 한쪽으로 쏠리고 인터넷에 한파가 몰아닥쳐도 ‘씨’가 마르는 건 아닙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개가 있습니다. 모바일이 있습니다. 복사수단은 널려있습니다. 전두환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체 표현수단은 넘쳐납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씨’가 마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과대망상입니다. 언론을 '어용' 또는 '관제'로 일색화했던 전두환 정권조차 민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유인물이나 대자보에 의존했던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의 광랜에 비견될 만큼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본질은 언론이 아니라 언로입니다. 언론을 단단히 틀어쥔다고 해서 시중의 언로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언론을 틀어쥐면 틀어쥘수록 언로는 다변화되고 팽창됩니다. 지금은 그럴 여건이 충분히 조성돼 있습니다.

역효과가 날 겁니다. 언론을 틀어쥘수록 언로를 통해 유포되고 확대되는 정보와 의견은 더욱 사나워질 겁니다. 언론이 ‘공정’ ‘객관’ ‘중립’의 룰에 묶여 최소한의 ‘사실보도’ 준칙을 지켜야 하는 반면에 언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태도와 감정을 듬뿍 담아 ‘사실’과 ‘의견’을 혼합시키겠죠. 이러다 보면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는 ‘괴담’도 더욱 많이, 그리도 더 빠르게 전파될지 모릅니다.

교훈도 있습니다. 언론의 역할은 제한적입니다. 전두환 시절의 '어용'·'관제' 언론이 반증합니다. 아무리 정보를 정권 입맛에 맞게 골라 퍼뜨려도, 아무리 정부 입장에 서서 국민을 ‘계도’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민심이 정치적 태도를 정하는 데에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 언론이 제시하는 의견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중한 요인은 바로 생활입니다. 민심이 자기 삶을 꾸려나가면서 겪게 되는 정부 정책과 정부 태도를 보면서 정치적 태도를 정합니다.

5.
이명박 정부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느 게 득이 될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 이젠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실용’ 즉 효율과 효용만 갖고 따지죠. 어느 게 실용적일까요?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짓입니다.

진리는 아주 간명한 모습을 띠고 나타납니다. 풍선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릅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약이 입에 쓰다고 내치면 합병증에 걸리는 것. 이것 또한 진리입니다.

하나 더 말할까요? 소탐대실은 동서고금이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사진 위 = 대자보는 아직도 살아있다. 얼마 전 고려대에 게시된 ‘폴리페서’ 관련 대자보 ⓒ여성신문
▲사진 아래 =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는 YTN 사원들 ⓒ오마이뉴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