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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8/29 쉰둘 회사원이 진단하는 '촛불의 길' (1)
  2. 2008/07/18 "누가 내딸 죽였나..진실 밝힐 것"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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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는 억압받는 촛불의 편에 서 주세요."

지난 23일 오후 3시 서울 명동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청 앞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겠다는 한 무리의 시민들과 이를 막는 경비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늦더위 속에 거센 몸싸움을 벌인 이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교구청 앞에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단식을 시작했다. 5일간 펼쳐진 농성의 시작이었다.

50대 회사원과 중년의 아주머니, 일흔이 다 된 할머니 등은 정 추기경을 만나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며 곡기를 끊었다. 5일간 물과 소금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이들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모두 천주교 신자였던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는 느닷없이 왜 서울대교구 교구청으로 달려가 단식농성을 시작하게 됐을까. 사회단체 활동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그들. 그저 평범한 '무명씨'일 뿐인데, 생업과 가정을 접고 거리로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대개 인터뷰를 사절해서 그 가운데 올해 쉰둘의 박정훈(가명, 중소기업 전무이사)씨를 28일 전화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올봄 여중고생들로부터 촉발된 촛불집회에 저도 자주 참여한 것 같아요. 유신과 군사정권, 민주정부 시절을 보내면서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지만 고질적인 병폐는 여전하지요. 산업현장에는 부정과 부패, 뒷거래가 횡행하거든요. 뒷거래 없이는 견딜 수가 없어요.

개인적 양심으로는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수치심이 있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못 버틴다는 어려움이 있어요. 부정부패가 정말 많이 사라졌지만, 잔존 찌꺼기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도로 활개 치기 시작했어요. 20년, 3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지요. 그동안 쌓아온 '민주 성장'이 급격하게 퇴보하는 걸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촛불을 들었죠."

박씨는 절박하다고 했다. 업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일일이 모두 다 전달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직감할 것이라고 했다. 뒷돈 없이는 살 수 없는 부조리의 시대가 다시 온다면 그 얼마나 암울하겠냐고 그는 개탄했다.

물론, 본인은 이미 쉰 살이 넘어 살아야 할 날들보다 산 날들이 훨씬 많지만, 당장의 문제에 눈감고 있자니 후대의 삶이 걱정된다고 했다. 부정과 부조리에 눈감고 편승하는 것은 양심상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봄 지나 여름 되니 어느덧 KBS와 MBC 앞을 전전하며 '공영방송 사수' '방송 민영화 저지'까지 외치게 됐다고 했다.

촛불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로 촉발됐지만 결국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현안마다 촛불을 들며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일갈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이를 갈고 정권교체를 준비해온 것에 비해 진보개혁진영은 '허송세월'을 한듯 하여 답답하다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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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의 위정자가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일을 추진하는 게 가장 큰 문제지요. 하지만 진보개혁세력들이 얼마나 상황을 간과했는지, 반대로 수구세력은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조중동의 왜곡보도에 따라 검찰과 경찰이 무리하게 네티즌을 탄압하고, 촛불을 모조리 잡아들이려 하고, 무고한 시민을 향해 색소탄을 쏘고, 국민을 돼지몰이 하는 등 민주국가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터지는 데도 소위 민주세력이라는 사람들이 무력하게 판판히 깨지며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국은 '조선일보의 나라'인가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게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면 지지 세력을 복원하고 진보개혁세력을 무력화 할 게 뻔해 보이는 상황에서, 진보 쪽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힘도 없이, 관망하는 아주 슬픈 상황이 된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 여의도 KBS 앞에서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있던 중년의 '등촌동 아주머니'와 '할머니' 등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달려가게 됐다고 했다. 촛불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벌인 '작전'이었다고 했다.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교회에 읍소를 해서 종교인들이 나서면 조금 더 달라진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대했다고 했다. 이것도 이름 없는 '무명씨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게다.

천주교 최고 지도자의 적극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27일 오후 5일간 외면해오던 그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정 추기경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께서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다양한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줄 것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나 자신도 부족하지만 국민의 뜻과 함께 하고 행동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씨는 "추기경님께서 내용상 표 나게 말씀하신 건 아니었지만 촛불의 시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며 "교회 전체가 당장 나서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면 촛불의 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당장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어도 '무명씨'들의 이런 노력이 쌓인다면 한국사회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했다. 87년 6월항쟁과 달리 2008년 촛불운동은 주도세력이 없는 자각된 시민 일반의 불복종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87년 당시에는 그야말로 깨어 있는 대학생들이 전면에 나서 시국의 문제점을 부각했지요. 지금은 일사분란 한 조직체계도 없고 긴밀한 네트워크도 없어요. 촛불시민은 개인들이기 때문에 정권이 작정하고 구속하고 탄압하면 숨을 수밖에 없죠. 전사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 생업이 있고.

그래서 정부도 쉽게 보고 조중동 광고중단 운동한 일반 시민들 막 잡아가는 것 같아요. 아무렇게나 무력을 휘둘러도 일개 시민이 뭘 대응하겠냐는 식인 거죠. 네티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거고. 촛불시민은 구심점이 없으니까 쉽게 스러질 수 있어요. 저도 그렇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데. 촛불이 그냥 스러지기에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너무 걱정되는데. 뭐라도 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쉰이 넘은 나이라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때도 묻히고 살 법하다. 더군다나 중소기업 중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박씨는 그냥 이렇게 촛불이 스러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기가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든단다. 사람들을 모아 명동성당으로 달려간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그의 이런 열정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자산 아닐까. 박씨야말로 시인 김수영이 노래한 '풀'처럼 가장 먼저 눕고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촛불민초'가 아닌가 싶다.

무명씨도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절박감을 갖고 있는데, 진보개혁 정치인들은 어떤 절박감을 갖고 있을까. 오늘 아침 조간에 실린 민주당 당직자들의 줄넘기 사진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다.

* 사진은 아고라에서 발췌했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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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도 안 돼 맥주 세 캔을 땄다. 신동직(48) 씨는 별안간 큰딸을 잃은 슬픔에 말을 잃었다. 벌써 13일째 밤낮 술과 담배로 지냈다. 딸이 간 뒤로는 밥숟가락을 든 게 다섯 번도 안 됐다.

가슴에 울화가 치밀어 암만 술을 들이부어도 답답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딸이 좋아했던 아파트 베란다에 털썩 주저앉아 행인들의 발걸음에 눈길을 보내는 게 요즘 일과다.

엄마 강정애(43) 씨도 종일 멍한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일도 손에 안 잡혔고, 사는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은 두 자식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이를 악물어야 하지만, 그건 머릿속 생각뿐이고 가슴은 순간순간 허물어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엄마!"하고 달려올 것 같은 환청이 들리면 이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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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소녀의 자살

지난 5일 촛불시위에 다녀온 안양 K정보고 3학년 여학생 신나래 양이 안양시내 한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정부와 언론은 촛불시위와 이 여고생의 죽음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노심초사했었다.

이 소녀의 부모는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딸의 죽음에는 학교교육의 병폐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경기도 교육청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에 나섰지만, 결론은 문제가 됐던 두 교사의 주장을 듣는 것에 그쳤다.

부모가 문제로 지적했던 ▲기초생활수급자 조사와 공개거명 ▲공납금 미납자 공개와 학교에 남기는 사례 ▲여고생 생리대 소지품 검사 ▲과잉체벌 등에 대해 경기도 교육청은 지난 16일 조사결과를 담아 회신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조사와 관련, 담임교사 A씨는 교육청 조사에서 "학비지원신청서를 나눠주면서 나래 이름을 호명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만일 했다면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점 사과하고 싶고, 인격적으로 모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공납급 미납자 공개와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학생을 불러 미납내역을 알렸고, 미납학생을 학교에 따로 남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흡연으로 적발된 학생의 가방을 검사한 적은 있지만 생리대처럼 여학생들이 드러내기 원하지 않는 부분까지 뜯어본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수학교사 B씨는 과잉체벌과 관련 "발로 찬 적 없다"며 "교육적으로 5대 이내에서 때린 적은 있지만 수학문제를 다 풀 때까지 때린 사실은 없다"고 부인했다. 강압적으로 수업한 적 없고, 틀린 개수대로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는 부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조사결과를 토대로 경기도교육청은 ▲체벌 지양 ▲소지품 검사 시 반드시 학교장 결재 ▲저소득층 자녀와 장애우 학생 등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상담활동 강화 ▲유사사안 발생 예방을 위한 생명존중 교육 실시 ▲비인격적, 비교육적 사례 발생 예방대책 강구 등을 학교측에 주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아버지 신동직 씨는 혀를 찼다. 힘 있는 분들이 언제 한번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얘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 있느냐며 체념 섞인 말투로 냉소했다.

지난 17일 뙤약볕이 살갗을 아프게 자극했던 오후, 경기도 청계산 인근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신양의 부모님을 만났다. 한평생 선량하게 살아온 부부는 경황이 없음에도 낯선 이의 방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산균음료에 빨대를 꽂아 밥상 위에 놓아준 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크지 않았던 분위기에서 아버지 신동직 씨는 그날의 사건부터 차례차례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5일 토요일 저녁이 돼도 나래는 집에 안 들어왔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밤 12시 5분경, 어떤 남자가 나래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라고 했다. 우리 나래는 어디 가고, 경찰이 전활 받느냐고 물었더니, 안양 샘병원에 있다고 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나래가 그 지경인 줄은 몰랐다.

청천벽력이었다. 엄마는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래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많이 다친 상태였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우리 큰딸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채로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래는 토요일 안양시내에서 친한 친구들을 만났다. 같은 학교 친구였던 한 친구에게는 평소 그가 갖고 싶어 했던 시계도 선물했다. 그리고 나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옛날에 살던 동네 아파트에 올라가 사고를 냈다. 그 아파트는 나래네가 10년동안 살았던 동네에 있었다. 그 아파트 후문과 나래네 지하단칸방이 연결돼 있었다.

"노점상 했지만 자식들 주눅 들게 키우지 않아"

지하단칸방 생활을 청산하고, 비록 임대일지언정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 나래는 늘 즐거워했다. 지난 겨울에는 아파트로 친구들을 불러다가 '떡볶이 망년회'도 열었다. 연계교육으로 한 대학의 인터넷정보학과에 합격이 내정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 딸이 갑자기 저 세상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한 까닭을 부모는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 강남에서 하루 종일 떡볶이, 오뎅, 순대를 팔다 새벽녘에 들어오면 게슴츠레 한 눈으로 일어나 "엄마 밥 안 먹었으면 차려 줄까" 했던 딸이다. 부모가 늘 새벽까지 일하는 터라 동생들 돌보기는 늘 제 차지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만큼 부모도 나래에게 잘했다. 아빠는 동대문에서 3만원 주고 산 신발을 3년째 신고 있지만, 딸이 기죽을까 메이커 신발도 곧잘 사줬다. 집이 가난하다고 애까지 주눅 들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부모는 가난해도 아이들만큼은 뭐든 풍족하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이니까. 

시험을 잘 봤다고 하면 흔쾌히 용돈도 줬다. 친구들이 한번 사면 너도 한번 사야 한다면서 아빠는 엄마 몰래 나래 손에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학교에 늦을라치면 아빠가 곧잘 학교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워낙 나래 얘기를 잘 받아주는 터라, 나래는 늘 아빠 옆에서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한동안 얘기를 이어가다 나래아빠가 라이터에 불을 당겼다. 이내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 물었다가 긴 한숨에 섞어 토해냈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서 나래아빠는 아주 오래 된 이야기까지 꺼냈다.

"전 3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그 옛날에 장애인이 뭘 배웠겠어요? 저는 배운 게 없습니다. 제가 못 배웠기 때문에, 우리 딸이 대학생이 된다는 게 저한테는 참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내게도 대학생 딸이 생기는구나, 너무 기뻤고, 남들에게 자랑할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나래는 제 희망이었습니다. 엄마아빠 생각하면 그렇게 할 애가 아닙니다."

두 사람은 20년 전 만나 결혼했다. 시계회사에 다니던 때 나래엄마를 만났다. 나래 두 살 때까지는 남대문에서 금은방을 했고, 그 뒤에는 금은방을 정리해 의류사업을 하다 실패했다.

살림살이가 많이 어려워졌다. 나래가 일곱 살 때 안양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엄마는 안양1번가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했고, 아빠는 14K 주얼리 숍을 했다. 그마저도 몇 개월 안 돼 문을 닫았고, 끝내 떡볶이, 오뎅, 순대를 파는 '노점상'을 시작했다. 벌써 12년째 떡볶이 포장마차를 하고 있는 셈이다.

부모가 떡볶이 장사를 하는 것을 나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다만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것을 친구들 사이에 숨겨왔는데, 담임선생님에 의해 그 사실이 알려져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고 했다. 아직도 신씨는 그날의 나래를 잊지 못한다고 읊조렸다.

사춘기 소녀의 숨기고 싶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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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에요. 마루에 앉아 엄청 울었어요. 선생님이 교실에서 친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일어나라고 그랬다는 거예요.

끝까지 안 일어나고 버텼더니 이름을 불렀다고 하더라구요. 니가 안 일어났으면 됐지 뭐, 했지만 나래는 곧이곧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아요.

사춘기 소녀인데 저라고 왜 숨기고 싶은 비밀이 없었겠어요. 아마도 나래는 그 점이 친구들에게 알려진 게 참 그랬던 모양입니다."

신동직 씨는 "고3 들어 나래가 많이 힘들어했다"며 "학교 가기 싫어했고, 방학만 기다렸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는데도 왜 학교에 좀 가볼 생각을 못했는지 정말 후회가 막급"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신동직 씨는 "진실을 밝혀 달라"고 짧게 당부했다. 1급 장애인으로 떡볶이 장사를 하는 아비가 세상에 대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기자님이 좀 나서달라고 말하며 쳐다보는 눈이 충혈됐다. 죽은 아이는 말이 없고, 학교와 교육당국도 책임 없다고 나 몰라라 하는 처지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울먹이기도 했다.

나래 엄마는 "없이 살아도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있다"면서 "우리 집이 바로 그런 집"이라고 말했다. 학교 얘기만 나오면 애가 표정이 변했는데도 먹고사느라 학교 한번 찾아갈 생각을 못했던 게 너무나 후회된다며 가슴을 치기도 했다.

"애가 워낙 괜찮으니까. 단 한 번도 말썽 피워 학교에 불려가본 일이 없으니까. 워낙 얌전하고, 공부도 중간은 하고, 뭐든 열심히 하고 얌전했으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친구처럼 지냈고, 대학 가면 지가 아르바이트도 해서 엄마 돕겠다고 했는데 다 물거품이 됐어요."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차별 없는 세상에서 못다 한 꿈 이루기를"

나래 아빠는 "목숨을 내놓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누가 딸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인지 명확히 밝히고 죽은 아이의 넋을 달래겠다고 했다.

나래 부모님은 인천 연안부두 13번 부표에서 바다 장으로 장례절차를 마쳤다. 친구들과 방학 때 바닷가에 놀러갈 계획이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해 영혼이라도 바닷내음을 실컷 맡도록 한 것이다.

일어공부를 잘해 늘 반에서 1등 했고, 일본문화와 일본사회에도 관심이 많았던 나래가 파도를 타고 넘실넘실 현해탄을 넘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래 아빠와 엄마의 마지막 당부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차별 없는 세상에서 못다 한 꿈 이루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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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