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제 후보 홈페이지
이번엔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다. "국민들이 눈이 멀었다"고 했다. "각종 비리와 범죄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이명박 후보와 지난 대선 불법자금 당사자인 이회창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크게 변화가 없는 것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로 인해 국민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인제 후보에 앞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김근태 공동 선대위원장도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국민 60%가 김경준의 말을 더 신뢰하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우리 국민이 노망든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오죽 갑갑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싶다. 위장전입에 위장채용, 땅 투기 의혹에 BBK의혹까지 생채기를 낼 만큼 냈는데도 국민들은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대선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갑갑해 할 만하다.
아예 모르는 것 같지도 않다. 이인제 후보는 국민이 눈이 먼 이유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 때문이라고 했다.

ⓒ김근태 위원장 홈페이지
그렇다고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절반의 이유다. 국민이 '눈이 멀고 노망이 든' 이유를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안다. '전통적 범여권 지지층'이 선술집에서, 택시 안에서 입을 모은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고 민심이다.
무슨 말이냐고?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다. 당시라고 해서 '김대중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없었던 게 아니다. 이른바 '홍삼 트리오'의 비리가 각종 게이트로 표면화됐고, 벤처·부동산·카드 거품은 터졌거나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고 결국 탈당을 강요받았다.
지금과 비교해서 나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람이 불었고 '이회창 대세론'은 꺾였다.
왜였을까? 5년 전에는 바람에 몸을 실었는데 지금은 왜 '노망'이 들어 거동조차 제대로 못하는 걸까?
대선이 정권 심판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건 아니다. 미래 비전을 채택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범여권은 이걸 간과하거나 실천을 못하고 있다.
5년 전의 노무현 후보에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체성이 있었다. '비주류 출신의 개혁일꾼'이라고 하는 뚜렷한 색깔이 있었다. 10년 전의 김대중 후보가 '정권교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면 5년 전의 노무현 후보는 '확실한 개혁'이란 비전을 내걸었다. 이런 비전이 '미워도 다시 한번'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지금의 범여권은 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가족행복시대'라는 거창한 꿈이 오히려 지금의 '불행'을 부각시킨다. "내가 당선되면 그것이 곧 정권교체"라면서도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애써 비껴간다.
색깔도 없다. 아니, 스스로 색깔을 회색으로 만들고 있다. '전통적 지지층의 복원'을 '과거로의 회귀'로 착각했는지 민주당과의 합당, 이인제 후보와의 단일화를 섣불리 추진했다가 면구스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개개인의 경쟁력도 없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참여정부의 2인자로 '실정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인제 후보는 '철새 정치인'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표현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눈이 먼 게 아니라 차마 눈 뜨고 못 봐 고개를 돌린 것이다. 노망이 든 게 아니라 마음이 차갑게 식어 몸까지 굳어버린 것이다.
새로운 소식이 들린다. 대통합민주신당의 김효석 원내대표가 오늘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을 치하했다고 한다. "끈질기게 (BBK의혹의)진실을 파헤치는데 앞장서준 의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자"고 했단다. 이번 주가 BBK 수사의 고비가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국민 60%가 김경준의 말을 더 신뢰하고 있는 이런 와중에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세태가 갑갑해 '노망'을 입에 올린 마당에 뭘 또 기대하는 걸까? 어떤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보기에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걸까?
믿는 모양이다. 자신들의 의혹 제기와 검찰의 수사결과는 급이 다르다고, 그래서 검찰이 이명박 후보와 BBK의 연관성을 밝혀내기만 하면 그게 마무리 펀치가 될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대통합민주신당이 창조한국당과 문국현 후보와의 단일화 작업을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확신이 전망으로 이어지나 보다. BBK로 타격을 입은 이명박 후보 지지율이 30%대로 하락하고, 정동영·문국현 단일화로 범여권 후보 지지율이 30%로 올라서면 이명박 대 이회창 대 범여권 단일후보의 3자 황금분할구도가 성립되고 그러면 이길 수도 있다고 전망하나 보다.
꽤 그럴듯한 그림이다. 정치는 생물이니까 가능성이 없다고 딱 자를 수도 없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다. 이른바 '3자 황금분할구도'는 판세를 재조정하는 것이지 판을 끝내는 게 아니다.
요체는 여전히 정체성이고 색깔이며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