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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참가자가 구속됐다. 연행자 561명 가운데 '첫 구속'이다. 법원은 10일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이모(44)씨와 윤모(51)씨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전모(44)씨는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아침을 먹다가 뉴스를 들었다. 이씨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고, 윤씨는 노숙자이며, 전씨는 생수판매업 자영업자란다. 무릇 그들이 궁금해졌다.

노숙자와 일용직 노동자, 자영업자가 촛불집회 첫 구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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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어렵사리 전씨와 만나게 됐다. 구속은 면했지만 영장실질심사까지 마치고 유치장을 나오게 된 터라 밀린 일이 많았다. 당장 생수를 공급해줘야 하는 일터들이 산적했다. 생일도 겹쳤다. 유치장에서 나온 이튿날, 전씨의 가족은 하루 앞당겨 '미리 버스데이'해줬다. 전씨는 집회에 참석했다 풀려난 게 무슨 대수라고 인터뷰까지 해야 하느냐고 사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씨의 영업용 자가용 1톤 트럭이 마침 '고장이 나줬'다. 생수업자는 차가 고장 나면 배달을 못하니 일을 할 수 없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마지못한 그는 검정색 배낭을 둘러메고 약속장소로 나와 주었다. '무명씨 이야기' 두 번째 주인공은 '촛불집회 첫 구속자' 전씨다. 물론 영장실질심사에서 풀려났지만.

다섯 번째 촛불집회에 나간 날 사고가 터졌다. 8일 새벽 1시 20분께 서울 광화문 세종로사거리 이순신 동상 앞에 그는 서 있었다. 대치하는 장소까지 갈 맘은 없었는데 어찌하다보니 그 앞까지 서게 됐다. 몇몇 시위군중이 철망을 타고 전경버스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안쓰러웠다.

'왜 못 올라가는 거야.'

속으로 읊조렸다. 발을 딛는 걸음마다 자꾸 미끄러지는 게 보였다. 답답했다. 전씨는 중3때부터 외삼촌을 따라다니며 암벽등반을 했다. 순간 산이 생각났다. 산에선 등반이 어려운 사람은 돕는 게 예의다. 그가 나섰다. 앞으로 달려가 먼저 올라가는 사람의 발에 손을 대주고 한발 한발 전경버스로 오르게 했다. 잇달아 그도 올랐다.

"전경 버스 위에 딱 섰는데, 버스 아래 전경들이 중지를 거꾸로 세우며 욕하는 게 보였어요. 꼭지가 돌았죠. 어린놈들이 이래도 되는 거야? 욕이 튀어나왔어요. 소리도 지르고. 경찰서에 갔더니 체증사진이 많더군요. 기물파괴는 하지 않았고, 사람 때리지 않아 구속을 면한 것 같아요."

전경버스 위에 서 있던 그는 양쪽 팔을 붙들린 채 시위군중과 멀리 떨어진 전경버스까지 끌려갔다. 전경들은 그의 다리를 꺾어 넘어뜨린 뒤 발로 밟고 걷어찼다고 했다. 명치를 얻어맞아 일순간 숨도 못 쉬었다.

멀리서 "야 이 놈들아 사람 죽이겠다, 그만해라" 소리가 들린 뒤에야 매질이 끝났다.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온몸에 멍이 들었다. 지금도 양 어깨와 등은 움직일 때마다 소스라치게 아프다.

"얻어맞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이런 XX는 죽여야 된다'는 소리였어요. 어린놈들이 마흔 넘은 아저씨한테 너무 하네 싶었어요. 하긴 때리고 맞을 때는 그런 게 없죠. 하하."

경찰의 고백 "아저씨 조사하고 있지만 내 마음도 같은 편이에요"

멋쩍게 웃었다.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그는 한 경찰로부터 웃지못할 '대한민국 현주소'도 들었다. 한 경찰은 "아저씨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도 그쪽"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87년 6월 항쟁이 생각났다. 경찰서에서 조사하는 사람이나, 조사받는 사람이나 같은 마음이지만 서로 서 있는 위치가 다른 것뿐이라는 그때 생각이 도로 났다고 했다.

전씨는 체육교육을 전공한 83학번이다.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못했다. 산을 워낙 좋아하는 산악인이라 주로 산에서 세월을 보냈다. 샐러리맨으로 직장생활도 했다. 체질적으로 메이는 게 싫은 그는 금세 관뒀다. 그 뒤로 사회단체 상근도 해봤다. 10년간은 전국의 사찰을 돌며 한옥 목수생활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서원이나 향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생수업을 시작한 건 작년 5월이다. 노모 때문이다.   

"남동생은 파주 출판단지로 출근하고 여동생은 결혼하니까 어머니 돌볼 사람이 없더라구요. 어머니가 척추관 협착증이 있어 거동이 불편하시거든요. 가족 중 누군가는 어머니를 모셔야 해서 제가 정착하기로 했어요. 사방팔방 떠도는 것도 지겹기도 했고."

아는 형이 제안한 것이었다. 시간을 잘 활용하면 주중 하루는 시간을 빼 산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한 게 결정타가 됐다. 산을 못 가면 몸살이 나는 터라서...

그는 한 달에 200만원을 번다. 동료 가운데 300만원 버는 사람도 있다. 생수 팔아 한 달에 300만원 벌려면 새벽부터 컴컴해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기름값이 너무 올라 죽어라 뛰어봤자 본전치기도 어렵다고 했다. 경유가격이 무섭게 오르지 않았냐는 게다.

시장에 가면 파리 날리는 가게가 너무 많다고 했다. 장사꾼들이 울상이라고 전했다. 밑바닥  경제는 이미 사망신고를 받은 것처럼 침울하다고 걱정했다. 노무현정부 때도 살기 어려웠지만 이명박정부와 비교할 게 못된다고 했다.

기름값 너무 올라 생수 팔아봤자 본전치기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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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는 이명박정부에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촛불집회도 그래서 나갔다고 했다. 비단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때문이 아니라는 게다.

"슬쩍 흘리고 국민들을 상대로 '간 보기'하는 정부가 너무 얄미워요. 한반도 대운하, 공기업민영화, 의료보험민영화 후순위로 뺀다, 이 말은 결국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추진하겠다 이 소리 아니에요?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야 워낙 '있는 놈들'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해명이 꼴불견 아닌가요?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어요. 얼마나 국민을 우습게 알면 '재협상'하라 요구에 '추가협상' 운운합니까."

전씨는 목청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했다. 미국에서는 20개월령 미만 뼈 없는 살코기만 먹는다는데, 우리는 왜 30개월 이상 뼈와 내장까지도 다 수입해 먹어야 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에서는 전혀 소비되지 않는 부위를, 그래서 사료로 쓰던 것들을, 우리가 'OK'하고 수입하니 미 축산업자들은 얼마나 이명박 대통령에게 '땡큐'하겠냐고 했다. 바로 이런 점이 촛불을 내릴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그는 경찰에서 풀려난 뒤 처음으로 14일 촛불집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허가받은 집회에만 참여한단다.

- 거리행진은?

"안할 거예요."


- 전경버스 위에는 또?

"아이쿠 무슨 소리예요. 이제 안 올라가요."

- 특별한 이유라도?

"노모께서 풀려난 뒤 처음 받은 생일상에 절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얘야, 집회에 나가는 건 좋은데 전경버스 위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럼 되겠니? 너도 이제 나이가 꽤 들었잖니. 마흔도 넘은 애가."

전씨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아버님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 삼남매 키우셨는데, 이 정도도 못 하면 장남이 아니라고 스스로 마음먹었다. 암만 울컥해도 어머니를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그가 촛불집회에 나가 폭력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였다.  

** 전씨는 재판을 앞두고 있어 이름과 사진 등을 공개하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뒷모습 촬영은 허락했다.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