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4일이었습니다. 폭설이 귀성차량을 서해안고속도로에 가뒀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TV가 한 장면을 무심하게 흘리고 있었습니다. 폭설에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의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땅으로 내려앉은 비닐하우스 철근 사이로 파란 새싹이 힘겹게 버티고 서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똑같은 일로 벼랑 끝에 몰렸던 한 농민을 떠올렸습니다.
#2
한승철 씨. 그는 전남 장성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최신식 난방설비를 갖춘 비닐하우스 4동, 그리고 설비가 떨어지는 비닐하우스 5동에 방울토마토를 기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비닐하우스를 한 건 아닙니다. 1991년 농대를 나와 전남 장성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벼농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남의 땅 일곱 마지기를 빌려 벼농사를 지어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많지 않았습니다.
원예농으로 돌았습니다. 딸기 상추 치커리 쑥갓 고추 멜론 피망…. 손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손을 대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수지가 맞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춤을 추는 농산물 가격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1995년, 한승철 씨는 방울토마토에 매달렸습니다. 방울토마토가 국내에 갓 도입된 터라 수지 타산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바로 그 해 방울토마토가 모두 죽었습니다. 새벽녘에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방울토마토 줄기는 고개를 숙였고 주렁주렁 달렸던 방울토마토는 얼어있었습니다. 밤새 전기가 나가 비닐하우스 안에 한파가 몰아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버텨보려고 했습니다. 때마침 희소식도 날아들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전업농을 육성한다며 시설 현대화 자금을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한승철 씨는 비닐하우스 4동을 더 지었습니다. 정책자금을 받아 난방시설이 완비된 비닐하우스 4동을 더 세웠습니다. 이전에 세웠던 5동까지 합쳐 모두 9동의, 남부럽지 않은 ‘하우스 부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잠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비닐하우스의 철근은 휘어졌고 비닐지붕은 내려앉았습니다. 다시 2년 뒤, 이번엔 폭설이 내리깔았습니다.
#3
한승철 씨의 부인 조은례 씨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장성에 인접한 광주 월계동의 한 아파트단지 앞에서 친환경농산물판매점 일을 보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다.
가정대를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농군의 아내가 된 게 1992년입니다. 이 때만 해도 낙천적이었습니다. 구속 받지 않는 삶이 좋았습니다. 농촌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노력한만큼 거둘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방울토마토 재배에 매달렸습니다. 신종 작물이니까 수익이 좋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저앉아버렸습니다. 1995년, 방울토마토 재배 첫해에 방울토마토가 모두 얼어죽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조은례 씨가 겨우 일어나 향한 곳은 광주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모아 광주에 팬시점을 차렸습니다. 한 해 수입이 날아갔으니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다시 추스렸습니다. 2년 만에 방울토마토와 함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비닐하우스로 돌아왔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전업농 육성정책 소식을 듣고 다시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를 세웠습니다.
또 다시 무너졌습니다. 태풍과 폭설로 내려앉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일가친지나 친구에게 손 벌릴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헛된 꿈을 꾸기에는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활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15년간 알고 지내온 지인이 제안을 했습니다. 친환경농산물판매점을 대신 관리하고 이익의 일부를 가져가라고 제안했습니다. 조은례 씨는 이때의 제안을 “하느님의 소리”였다고 말합니다. 외줄기 구원의 소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년…. 조은례 씨는 여전히 점원으로 일하고, 한승철 씨는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재배합니다.
#4
태풍은 오지 않았습니다. 폭설도 비껴갔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자연재해에서 무사히 비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행수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번엔 ‘구조’가 생채기를 냈습니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시장가격에 한승철 씨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해인가, 방울토마토를 크기에 따라 5단계로 선별해 광주 도매시장에 내놨답니다. 한 곳에 5kg짜리 72상자, 다른 곳엔 70상자를 내놨답니다. 전표를 받아보곤 기가 차더랍니다. 한 시장에선 가격이 만원, 만이천원, 만삼천원, 만사천원했는데 다른 시장에선 오천원, 육천원, 칠천원, 팔천원 나왔더랍니다. 똑같은 날에 똑같은 제품을 내놓은 것인데도 가격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더랍니다.
한승철 씨는 말합니다. 농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진에 따라 가격이 춤을 추는 건 농사가 아니라 ‘섰다판’이라고 ‘빠징코’라고 말합니다.
직불금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WTO규정을 들어 그건 불가능하다고 읊조리는 정부, 최저가격보상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부를 그래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한승철 씨는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기계에 지급되는 면세유를 줄이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일부 농민이 면세유를 빼돌려 팔아먹으니 줄여야한다고 하는데 그건 기계 많은 대농(大農)에게나 적용되는 얘기라고, 결국 이런 조치 때문에 소농(小農)만 엉뚱한 피해를 본다고 했습니다. 농기계 구입자금만 지원해놓고 농기계제작업체가 도산해 부품 조달을 할 수 없는 현실은 외면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사짓기보다 부품 찾아 중고 기계 찾아 발품팔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해 3조원 정도 되는 농특세마저 폐지하려는 방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가현실을 고려할 때 3조원도 쥐꼬리만한 돈인데 이것마저 없애 지원을 줄이면 농가는 어떻게 사냐고 했습니다. 대선 때 농가부채 및 이자 동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 뒤 아무 말이 없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탓에 연말 되면 농협에서 이자와 원금 상환 고지서가 수없이 날아든다고 했습니다.
#5
한승철 씨를 만난 게 지난달 27일이었습니다. 한승철 씨의 표현을 빌리면 “우체통에 농협 고지서가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며 경악하는” 그 때였습니다.
하루종일 한승철 씨의 졸졸 따라다니며 지켜봤습니다. 농협에 들러 농가부채를 하소연하는 모습을,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융통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잠을 못 이룬다고 했습니다. 아내 조은례 씨는 남편이 밤잠을 설치며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고 했습니다.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 체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마저 힘들어 하면 남편의 부담이 가중될까봐, 아이들에게 근심이 퍼질까봐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선다고 뾰족수가 생기는 게 아니어서 짐짓 모른 체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 한승철 씨가 1월까지 농협에 갚아야 하는 돈이 1500만원 가량 된다는 건 취재 말미에 잠깐 들을 수 있었습니다.
#6
오늘 아침 전화를 걸었습니다. 행여 폭설에 비닐하우스가 또 상했을까봐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여 다만 몇푼이라도 부채를 상환했나 싶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폭설이 피해갔다고 하더군요.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농협 부채는 손도 못 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트럭을 몰고가던 한승철 씨가 논 한 가운데 늘어선 비닐하우스를 보며 혼잣말처럼 했던 말입니다.
“저녁에 달빛이 비칠 때 비닐하우스를 보면 바닷물이 출렁이는 것처럼 보이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름답지가 않아요. 전혀….”
▲자료사진=폭설에 내려앉은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