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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저께군요.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이 책 저 책에 침을 묻히다가 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 모두 하늘을 향해 곧추 섰더군요.

서점 문을 열고 나와 엎어지면 코 닿을 피맛골 음식점으로 향했습니다. 재개발 때문에 모두 헐리고 세 집 밖에 남지 않은 그 곳. 풍경은 썰렁했지만 맛은 그대로였습니다.

순두부찌게를 시켜놓고 물대신 나온 숭늉을 후후 불어 마시는데 키가 190cm쯤 돼 보이는 외국인 남성이 꾸부정한 자세로 들어와 어눌한 말투로 음식을 시키더군요. “제유포쿰!”

순두부를 밥에 비비며 훔쳐본 그 사람의 손놀림은 능숙했습니다. 한두 번 먹는 게 아닌 듯 제육볶음이 담긴 접시에 공기밥을 붓더니 석석 비벼 맛있게 먹더군요. 살짝 웃었습니다. 그에겐 매웠을 법한 제육볶음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정겨웠고, 누렇게 색 바래고 여기저기 볼펜똥이 묻은 벽지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친숙했습니다.

2.
오늘 신문을 보니 피맛골에 얽힌 기사가 실렸더군요.

‘청일집.’ 청진동에서 제일 먼저 생겼다고 해서 간판을 ‘청일집’으로 올렸다는 그 음식점이 65년의 역사를 접고 이사를 간다는 뉴스였습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에 수없이 늘어섰던 음식점들이 그러했듯 ‘청일집’ 또한 재개발의 뒤켠으로 사라진다는 뉴스였습니다. ‘청일집’과 함께 막걸리 시절의 추억도 사라진다는 뉴스였습니다.

3.
추억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피맛골이 사라짐과 동시에 대포 문화가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탁배기 한 사발에 시대에 대한 불만과 살림살이의 강퍅함을 털던 서민 문화가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디자인 서울’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역사와 생활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서울에 와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 밖에 본 기억이 없다고 투덜대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제대로 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잘 정돈된 전통가옥만이 아니라 보통 한국인의 보통 생활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재산권 행사를 어찌 막느냐는 항변과, 다른 종로통에 남아있는 피맛골은 보존하지 않느냐는 핀잔에 정색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완전히 털어낼 수 없습니다. 교보문고 옆 피맛골만의 고유한 생선 굽는 냄새가 있었거든요.

새삼 궁금해지네요. ‘제유포쿰’을 맛있게 먹던 그 외국인은 이제 어디로 향할까요?

▲캡쳐=‘청일집’ 철거 소식을 전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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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아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군요. 

‘아빠, 편지 봤어?’

느닷없이 웬 편지 타령인가 싶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무슨 편진데?’
‘…아니, 관리비 고지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뭐 반가운 편지라고 이른 아침부터 호들갑인가 싶어 그냥 “알았어” 하고 끊었습니다. 그리곤 까맣게 잊었죠.

집에 들어가니 침대 옆 탁자에 문제의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봉투가 놓여있더군요. 달갑지 않았습니다. 한파로 끌어올린 보일러 온도만큼 관리비 또한 늘어났을 게 분명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관리비는 전 달에 비해 8만원 넘게 더 나왔더군요.

한숨 크게 내쉬고 봉투를 집어던지려던 순간 흰 종이가 끼어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포장이사업체의 천연색 홍보전단과는 다른 순백의 종이였습니다.

‘아빠에게.
아빠, 나 때문에 화나거나 짜증날 때가 자주 있지? 비록 작은 돈이지만 받아주고 앞으로 오래오래 살자. 메리 크리스마스!!!
아빠의 자랑스런 장남, ○○올림’

순백의 종이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렁이가 기어가듯 한 글자 한 글자가 제각각 누워있었습니다.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반강제로 쓴 의례적인 편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쓴 편지를,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받은 게 처음이라 의외였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 된 놈이 아빠에게 돈을 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환갑 넘은 아버지와 서른 넘은 아들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니까요. 

뜨악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봉투를 다시 뒤졌습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10원짜리 동전 하나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아들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무슨 돈인데?”
“응, 만원.”
“만원? 네가 돈이 어딨어?”
“용돈 아껴서 모은 거야.”
“그걸 왜 아빠에게 줘?”
“아빠 돈 버느라고 힘들잖아.”
“그래서 보태주려고?”
“응.”
“근데 왜 돈이 없냐?”
“심부름하느라고 썼어.”
“심부름? 무슨 심부름?”
“할머니가 뭐 사오라고 하셨는데 돈 꺼내기 귀찮다고 일단 그 돈으로 쓰래.”
“그래서?”
“나중에 받았어.”
“그럼 왜 아빠한테 안 줘?”
“히히, 깜빡했어.”

저도 웃고 아들도 웃었습니다. 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아들은 뒷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리곤 잠깐 동안의 정적…. 여전히 미소를 흘리는 아빠를 남겨둔 채 방을 나가던 아들이 돌아서며 한 마디 하더군요.

“아빠, 선물 좀 잘 감춰.”
“왜?”
“△△이 봤잖아.”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이 장롱 속에 숨겨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발견했다고 밀고하는 아들이 양미간을 찌푸립니다. 천재라더니 조그만 선물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냐는 투로 침대에 널브러진 아빠를 내려다봅니다.

벌써 다 컸나 봅니다. 아빠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도 그렇고, 같은 돈으로 아빠와 할머니의 환심을 동시에 사는 것도 그렇고, 생색은 다 내면서도 결국은 제 주머니로 돈을 집어넣는 것도 그렇고…. ‘원소스 멀티유스’의 비법에다가 봉이 김선달의 비기까지 벌써 깨우친 것 같습니다^^

팔불출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아들은 정말 “자랑스런 장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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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강화도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바다 건너 석모도가 보이는 장화리라는 곳이었지요.

사람 반 차 반인 유명 휴양지, 바가지요금 반 짜증 반인 유명 관광지와는 달리 고즈넉한 곳이었습니다. 이국적인 모양의 펜션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우리네 농촌 모습이 보존돼 있는 곳이었습니다.

휴가 첫날, 펜션에 딸린 수영장(규모가 사우나 냉탕급)에 아이들을 남겨놓은 채 바다에 나가 망둥어 낚시를 했습니다. 밀물이 들이찬 바다에 몸을 반쯤 담근 채 팬션에서 빌린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웠는데, 역시 ‘제일 미련한 물고기’라는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더군요. 지겨움을 느낄 겨를을 주지 않은 채 끊임없이 입질을 해대더군요.

하지만 특별한 경험은 따로 있었습니다.

휴가 둘째날, 콤바인을 개조한 차량을 타고 드넓은 개펄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물고기며 조개를 바리바리 잡아올렸습니다. 바다 체험을 안내하는 ‘낙조회집’의 조덕환 대표가 미리 쳐놓은 그물에서 잔챙이 물고기들을 먼저 수확(?)한 다음 개펄에 손가락을 찔러넣어 모시조개를 잡고, 이어서 다른 그물에 걸린 어른 팔뚝만한 숭어와 광어를 잡아올리고, 이어서 맛소금 뿌려가며 개맛을 뽑고…. 세 시간 여에 걸친 어로활동(?)을 마치고 나니까 큰 고무대야가 가득 차더군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금부터 어로현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맘껏 감상해 보시길….



▲첫 번째 그물에서 꽃게며 광어며 잔챙이들을 털어내는데 갈매기 수십 마리가 모여들더군요. 죽어버린 잔챙이 물고기들을 던져주면 깩깩 울어대며 군무를 펼치고…. 그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모시조개를 잡는 방법은 개펄에 난 구멍을 헤집는 것인데요. 아무 구멍을 헤집는 게 아니랍니다. 8자모양의 구멍, 조그만 구멍 두 개가 모여 약간 길다랗게 생긴 구멍을 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시조개를 캐낼 확률이 십중육칠.


▲꽃게 모습이 이상하죠? 지금이 허물을 벗는 기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습이 이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꽃게찜을 시식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어른 팔뚝만한 숭어를 50여마리쯤 건졌는데 아쉽게도 상당수가 죽어있더군요. 조덕환 대표의 말에 따르면 너무 일찍 그물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회를 떠 포식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몇 마리는 살아있었고, 죽은 숭어도쓸만했으니까요.


▲커다란 고무대야에 담은 물고기들을 분류하니 숭어가 50여마리, 광어가 서너마리, 모시조개가 60-70개, 꽃게가 40여마리…. 이중 일부는 점심 밥상에 회나 찜으로 오르고, 모시조개는 다음날 구이로 오르고…. 조덕환 대표는 잔챙이를 액젓으로 담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포기하고, 숭어는 배를 갈라 소금에 절여 아이스 박스에 담아왔는데 서울에서 이 걸 말릴 생각을 하니 아래 위 집에서 비린내 난다고 항의할까봐 눈물을 머금고 펜션 주인에게 헌납하고 왔습니다.


▲다 아시죠? 강화도 개펄은 보존가치가 높은 세계적인 개펄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어민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대가로 그물 치는 걸 금지했다고 하는데요. ‘낙조회집’의 조덕환 대표는 7년 전에 이뤄진 보상을 받지않아 합법적으로 그물을 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덕분에 1년 사시사철 하루에 한팀씩을 받아 바다에 나간다고 하는데 8월까지는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예약이 꽉 찼고, 주말의 경우 11월까지 대기상태라고 하더군요.

꽤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칠순 어머니를 모시고 3형제 가족 11명이 총출동했는데 바다체험 비용은 30만원. 이 금액에 밥상차림 비용이 모두 포함돼 있으니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생명이 살아숨쉬는 개펄의 생태와 소중함을 일깨워줬고, 이틀 동안 회에다 조개구이에다 실컷 포식했으니 일석이조, 님도 보고 뽕도 딴 셈이죠. 

통상의 갯막이(마다에 그물기둥을 세워놓고 그물을 친 다음에 물속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아올리는)와는 다르게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털어내는 것이어서 약간 아쉽긴 했지만 조개 캐고 맛조개 뽑아올리고 꽃게 잡는 것으로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말의 경우 11월까지 예약이 꽉 차 여기서 강추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연락처 남깁니다. 예약이 취소될 수도 있고, 주중에 가실 분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연락처는 <낙조회집 대표 조덕환 032-937-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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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어제 오후 2시쯤이었습니다. 둘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빠, 선생님이 선물 도로 갖고 가래.”
“왜?”
“못 받는데. 교장선생님이 받지 말라고 하셨대.”
“그래서?”
“그냥 갖고 왔어.”

잠시 멍했습니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촌지는 줘서도 안 되고 주지도 않겠노라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용케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달랐습니다. 스승의 날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작은 성의를 표하는 것까지 엄한 기준 밑에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되면 형편껏 마음을 담아 보냈고 그 때마다 아이를 통해 “선생님이 고맙대”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그마한 녹차 세트를 곱게 포장해 보내면서 “고맙습니다”란 의례적인 말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혹시 이 녀석이 뭘 실수한 건가?’

다른 사정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어땠는데?”
“애들도 다 그냥 갖고 갔어.”

그제서야 대충 ‘그림’이 잡혔습니다. 둘째에게 “알았어”라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학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머리속에 그려진 ‘그림’이 '실제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물밀 듯 밀려왔거든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허스키한 음색에 낮고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월급을 받는데 그런 걸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성의인데….”
“죄송합니다. 애들이 들고 온 꽃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교장선생님의 ‘지시’는 여쭐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지시’는 핑계였을 겁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왜 선물을 안 받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난감했을 겁니다. 자칫하다간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둘러댄 것이었을 겁니다.

전후맥락은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그렇다고 곧장 말을 거둘 순 없었습니다. 그래도 삼세번이라고 한 마디 덧붙여야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요. 그래도….”

그 순간 선생님이 말꼬리를 자르며 화제를 돌렸습니다.

“○○이가 찰흙을 잘 만져요. 이것저것 잘 만들고, 조소 쪽에 소질이 있어 보여요(다른 공부 잘 한다는 말은 안 하더군요).”
“아, 네. 학급생활에 잘 적응하나요?”
“그럼요. 얼마나 활달한데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습니다. 변변히 말 한 번 못하고 선생님의 화법에 ‘말려’ ‘네, 네’만 연발하다가….

집에 돌아와 들춰봤습니다. 둘째가 되갖고 온 선물 포장지를 훓어봤습니다. 포장지 겉면에 테이프로 붙여놨던 둘째의 편지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편지는 보셨니?”
“응, 편지만 갖고 선물은 도로 주시던데.”

선생님은 ‘너무 고마운 우리 선생님께’라고 삐툴빼툴 적힌 편지만 받고 쑥색 한지로 곱게 포장된 상자는 돌려보냈습니다. 마음만 받고 물건은 돌려보낸 겁니다.

‘저 선물을 어찌 할꼬?’라는 생각은 잠깐뿐, 곧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어린이채널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있는 둘째에게 농반진반으로 말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이 너보고 미술 잘한데.”
“알아, 찰흙만들기 잘 했다고 칭찬받았거든.”
“그래? 너 미술학원 다닐래?”

그제서야 둘째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육해공을 넘나드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활극에 헤벌래한 표정과 뜻모를 감탄사를 바치던 둘째가 고개를 돌리더니 외마디를 남겼습니다.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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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그의 얼굴은 멀쩡했습니다. 경계하는 눈길이 느껴지긴 했지만 얼굴 어느 구석에서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노동에 굳어지고 갈라진 손바닥 외에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말하더군요. 취재를 온다고 해서 박스 테이프로 얼굴과 손의 그것을 뜯어냈다고, 옷으로 가릴 수 없는 부분만 모두 떼어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줬습니다. 물고기 비늘처럼 갈라진 피부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어린선’이란 병을 앓아왔습니다. 흔히 ‘뱀살’로 불리는 병입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는 병입니다. 이 병이 그의 42년 인생을 너무 굴곡지게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잔뜩 화가 난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다짜고짜 그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옷을 걷어올리라고 하더니 “이건 때”라며 집에서 씻고 오라고 혼을 냈습니다. 그는 집에 가 숟가락을 집어들었습니다. 그 숟가락으로 맨살을 벅벅 긁었습니다. 울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남 순천에 있는 직업훈련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교관이 휙 한 번 훓어보더니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오라고 했습니다. 진단서를 들고 찾아갔더니 ‘입소 불가’라고 짧게 말하곤 내쳤습니다. 울며불면 매달리는 그를 매정하게 내쫓았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을 할 때였습니다. 질통을 지고 가는데 뒤따라오던 형이 질통을 발로 찼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싫다고 하면서 질통을 진 그의 등짝을 떠밀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판과 동대문 봉제공장을 전전하던 20여년 동안 한 곳에서 1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일이 고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를 버텨내지 못하고 번번히 작업장을 나와야 했습니다. 가장 길게 일한 곳이 6개월, 딱 한 번이었습니다.

그는 5년 전부터 봉제공장을 다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역시 봉제일을 하는 부인과 함께 집에 재봉틀을 들여놨습니다. 도급을 받아 집에서 재킷이며 바지며 남방을 만듭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일은 집에서 한다고 해도 물량을 따려면 동대문 주변에 몰려있는 공장을 돌아다녀야 합니다. 자신이 만든 샘플을 보여주고 일감을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반응은 똑같습니다. 샘플을 보고 좋아라하던 공장주나 의류점 주인이 그와 마주 앉기만 하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경기 한파에 봉제 물량이 줄었고, 싸늘한 편견에 그 적은 물량마저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가 1월 한 달동안 벌어들인 돈은 27만원입니다. 그 돈으로 설 차례상을 차렸고 두 남매에게 2만원짜리 점퍼를 하나씩 사줬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습니다. 먹고사는 게 궁핍한 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습니다. 전남 장흥 고향집에 계신 노모가 쌀이며 김치며 이것저것 보내주기에 밥상은 차릴 수 있습니다. 동대문 공장주들의 편견도 어렵지만 피해갈 수 있습니다. 직접 영업을 하는 대신 벼룩시장 같은 데 난 도급물량을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동네 같은 주민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고자질하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1월말이었습니다. 형사 세 명이 서울 보문동에 있는 그의 지하방에 들이닥쳤습니다. 며칠 전 현금지급기에서 도난 된 카드로 현금을 인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용의자가 당신이라며 집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기가 찼습니다. CCTV 카메라에 찍힌 도둑의 얼굴생김새가 그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축구공처럼 둥근 그의 얼굴과는 달리 도둑의 얼굴은 갸름한 ‘마상’이었습니다. 한 눈에 알아볼 만큼 얼굴형이 달랐는데도 동네 주민은 형사 앞에서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번 한 번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는 오토바이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오토바이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 광경을 본 동네 주민이 그가 오토바이를 훔쳐가려 한다며 파출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입니다. 서울 신설동 로터리 주변에서 같은 한국말 쓰고 같은 한국 김치 먹고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다니지 못합니다. 맘대로 거리를 활보하지 못합니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녀석 손을 잡고 동네목욕탕을 가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수인(囚人)’입니다. 편견의 감옥에 갇혀 사는 ‘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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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어떤 사장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장입니다.

이 사장은 착합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입을 말합니다.

직원 회식이 있었답니다. 이런 수다 저런 수다 떨던 중에 여직원이 등산을 좋아한다며 근사한 스틱을 쥐고 산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며칠 후였답니다. 이 사장이 스틱 두 자루를 건네더랍니다. 자전거를 타고 종로에 나가 스틱을 사왔더랍니다.

말단 직원이 대놓고 말했답니다. 지난해 여름에 이 사장에게 "휴가비 좀 주면 안 되나요"라고 투덜거렸답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누구 하나 휴가비 얘기를 꺼내지 못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이 사장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몇 푼 안 되지만 지갑에 있던 지폐를 모두 꺼내주더랍니다.

이 사장은 무능합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평가합니다.

맺고 끊는 걸 분명히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만고만한 기획사와 올망졸망한 회사를 상대하다보니 인쇄대금을 떼이기 일쑤인데도 박정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금 결제를 하지 않은 채 연락을 몇 달간 끊었던 거래처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한 번만 더'를 간청하면 내치지 못하고 인쇄를 해준답니다. 그리곤 또 떼인 답니다. 이렇게 해서 누적된 미수금이 10억 원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총부채 10억 원과 똑같은 액수라고 합니다.

이 사장은 책망합니다.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한 달여 전에 직원 한 명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경기 한파에 인쇄 매출이 절반으로 줄자 어쩔 수 없이 공장 직원 한 명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공장장과 고참 직원이 감원이 불가피하다고 건의했고 결국 이 사장은 직원을 6명에서 5명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 사장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가 영업만 제대로 했다면 물량이 줄지 않았을 것이고, 물량이 줄지 않았으면 잔업을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직원을 내보낼 일도, 잔업수당을 받지 못해 급여가 30% 가까이 자동 삭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자책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영업을 못 했기에 이렇게 자책하는 걸까요?

일화 하나를 털어놓더군요. 몇 년 전 추석을 앞두고 큰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자기들 거래처가 10곳 있는데 추석 때 인사를 오지 않은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까놓고' 말하더랍니다.

이 사장은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18년 동안 인쇄일을 하면서 '선물'이든 '뇌물'이든 그 어떤 '물건'도 바친 적이 없습니다. 접대성 음주를 한 적도 없습니다. '공장얘기' 빼고 막걸리 한 잔 걸친 적은 있지만 접대성 폭탄주는 돌린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토로하더군요. "돌아보면 그게 최고의 영업덕목은 아니었다"고 자조하더군요.

이 사장을 만난 게 설 연휴 직전이었습니다. 1월 24일, 충무로 한켠의 허름한 식당에서였습니다.

술을 한 잔씩 돌리더군요. 창피하다고, 미안하다고, 자신이 추잡스럽게 느껴진다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면서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군요. 상여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됐다고, 그냥 적금 들어놓았다고 생각해 달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더군요.

이쯤 됐으면 직원들 얼굴이 굳어질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 숙인 사장을 '훈계'하더군요.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당뇨병 환자가 술을 마시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더군요. 한 직원이 그러더군요. 그래도 월급만은 또박또박 맞춰주지 않았냐고, 우리는 상여금을 못 타는 것뿐이지만 사장님은 월급 한 번 변변히 가져가본 적이 없지 않냐고 위로하더군요.

....................

한나라당의 홍준표 원내대표가 어제 국회 원내교섭단체 연설에서 호소했습니다. 서로 한발씩 양보해 고통을 분담하자고,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자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가 출범했습니다. “개별 주체의 이익보다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겠다”고 했습니다.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에 불참한 민주노총은 상장기업 559곳의 사내유보금의 10%인 39조원을 고용기금으로 활용하자고 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압니다.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고 고통을 조금씩 분담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노사정 대타협을 주장하면서도 비정규직법 개정을 밀어붙이려는 한나라당의 이율배반적인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먼저 상기하고 그것보다 세밀히 살펴야 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과문한 탓일까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대기업 ‘회장님’이 고개 숙여 사죄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대기업 총수 일족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내놓고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외환위기 와중에도, 직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와중에도 재산 숨기는 데 바빴던 '회장님'이 적지 않았음이 검찰의 공적자금비리 수사에서 밝혀졌습니다.

비교가 너무 극단적이었나요? 회사가 파산 직전에 갔던 10년 전과 파산을 피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지금은 다른 걸까요?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회사 사정을 이유로 수많은 노동자가 내밀리는 현상은 똑같습니다.

막무가내로 ‘기계적 균형’을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동자를 쫓아낸 만큼 ‘회장님’도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목만 아플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은 보여야 합니다. 경영실태를 공개하는 양식있는 태도, 부하 직원의 실직과 임금삭감에 가슴 아파하며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양심적인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양해는 양식있고 양심적인 행동이 선행돼야 우러나는 것입니다.

인쇄소 사장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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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

#1
24일이었습니다. 폭설이 귀성차량을 서해안고속도로에 가뒀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TV가 한 장면을 무심하게 흘리고 있었습니다. 폭설에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의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땅으로 내려앉은 비닐하우스 철근 사이로 파란 새싹이 힘겹게 버티고 서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똑같은 일로 벼랑 끝에 몰렸던 한 농민을 떠올렸습니다.

#2
한승철 씨. 그는 전남 장성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최신식 난방설비를 갖춘 비닐하우스 4동, 그리고 설비가 떨어지는 비닐하우스 5동에 방울토마토를 기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비닐하우스를 한 건 아닙니다. 1991년 농대를 나와 전남 장성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벼농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남의 땅 일곱 마지기를 빌려 벼농사를 지어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많지 않았습니다.

원예농으로 돌았습니다. 딸기 상추 치커리 쑥갓 고추 멜론 피망…. 손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손을 대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수지가 맞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춤을 추는 농산물 가격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1995년, 한승철 씨는 방울토마토에 매달렸습니다. 방울토마토가 국내에 갓 도입된 터라 수지 타산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바로 그 해 방울토마토가 모두 죽었습니다. 새벽녘에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방울토마토 줄기는 고개를 숙였고 주렁주렁 달렸던 방울토마토는 얼어있었습니다. 밤새 전기가 나가 비닐하우스 안에 한파가 몰아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버텨보려고 했습니다. 때마침 희소식도 날아들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전업농을 육성한다며 시설 현대화 자금을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한승철 씨는 비닐하우스 4동을 더 지었습니다. 정책자금을 받아 난방시설이 완비된 비닐하우스 4동을 더 세웠습니다. 이전에 세웠던 5동까지 합쳐 모두 9동의, 남부럽지 않은 ‘하우스 부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잠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비닐하우스의 철근은 휘어졌고 비닐지붕은 내려앉았습니다. 다시 2년 뒤, 이번엔 폭설이 내리깔았습니다.


#3
한승철 씨의 부인 조은례 씨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장성에 인접한 광주 월계동의 한 아파트단지 앞에서 친환경농산물판매점 일을 보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다.

가정대를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농군의 아내가 된 게 1992년입니다. 이 때만 해도 낙천적이었습니다. 구속 받지 않는 삶이 좋았습니다. 농촌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노력한만큼 거둘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방울토마토 재배에 매달렸습니다. 신종 작물이니까 수익이 좋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저앉아버렸습니다. 1995년, 방울토마토 재배 첫해에 방울토마토가 모두 얼어죽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조은례 씨가 겨우 일어나 향한 곳은 광주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모아 광주에 팬시점을 차렸습니다. 한 해 수입이 날아갔으니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다시 추스렸습니다. 2년 만에 방울토마토와 함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비닐하우스로 돌아왔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전업농 육성정책 소식을 듣고 다시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를 세웠습니다.

또 다시 무너졌습니다. 태풍과 폭설로 내려앉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일가친지나 친구에게 손 벌릴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헛된 꿈을 꾸기에는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활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15년간 알고 지내온 지인이 제안을 했습니다. 친환경농산물판매점을 대신 관리하고 이익의 일부를 가져가라고 제안했습니다. 조은례 씨는 이때의 제안을 “하느님의 소리”였다고 말합니다. 외줄기 구원의 소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년…. 조은례 씨는 여전히 점원으로 일하고, 한승철 씨는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재배합니다.

#4
태풍은 오지 않았습니다. 폭설도 비껴갔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자연재해에서 무사히 비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행수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번엔 ‘구조’가 생채기를 냈습니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시장가격에 한승철 씨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해인가, 방울토마토를 크기에 따라 5단계로 선별해 광주 도매시장에 내놨답니다. 한 곳에 5kg짜리 72상자, 다른 곳엔 70상자를 내놨답니다. 전표를 받아보곤 기가 차더랍니다. 한 시장에선 가격이 만원, 만이천원, 만삼천원, 만사천원했는데 다른 시장에선 오천원, 육천원, 칠천원, 팔천원 나왔더랍니다. 똑같은 날에 똑같은 제품을 내놓은 것인데도 가격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더랍니다.

한승철 씨는 말합니다. 농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진에 따라 가격이 춤을 추는 건 농사가 아니라 ‘섰다판’이라고 ‘빠징코’라고 말합니다.

직불금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WTO규정을 들어 그건 불가능하다고 읊조리는 정부, 최저가격보상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부를 그래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한승철 씨는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기계에 지급되는 면세유를 줄이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일부 농민이 면세유를 빼돌려 팔아먹으니 줄여야한다고 하는데 그건 기계 많은 대농(大農)에게나 적용되는 얘기라고, 결국 이런 조치 때문에 소농(小農)만 엉뚱한 피해를 본다고 했습니다. 농기계 구입자금만 지원해놓고 농기계제작업체가 도산해 부품 조달을 할 수 없는 현실은 외면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사짓기보다 부품 찾아 중고 기계 찾아 발품팔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해 3조원 정도 되는 농특세마저 폐지하려는 방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가현실을 고려할 때 3조원도 쥐꼬리만한 돈인데 이것마저 없애 지원을 줄이면 농가는 어떻게 사냐고 했습니다. 대선 때 농가부채 및 이자 동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 뒤 아무 말이 없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탓에 연말 되면 농협에서 이자와 원금 상환 고지서가 수없이 날아든다고 했습니다.

#5
한승철 씨를 만난 게 지난달 27일이었습니다. 한승철 씨의 표현을 빌리면 “우체통에 농협 고지서가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며 경악하는” 그 때였습니다.

하루종일 한승철 씨의 졸졸 따라다니며 지켜봤습니다. 농협에 들러 농가부채를 하소연하는 모습을,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융통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잠을 못 이룬다고 했습니다. 아내 조은례 씨는 남편이 밤잠을 설치며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고 했습니다.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 체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마저 힘들어 하면 남편의 부담이 가중될까봐, 아이들에게 근심이 퍼질까봐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선다고 뾰족수가 생기는 게 아니어서 짐짓 모른 체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 한승철 씨가 1월까지 농협에 갚아야 하는 돈이 1500만원 가량 된다는 건 취재 말미에 잠깐 들을 수 있었습니다.

#6
오늘 아침 전화를 걸었습니다. 행여 폭설에 비닐하우스가 또 상했을까봐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여 다만 몇푼이라도 부채를 상환했나 싶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폭설이 피해갔다고 하더군요.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농협 부채는 손도 못 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트럭을 몰고가던 한승철 씨가 논 한 가운데 늘어선 비닐하우스를 보며 혼잣말처럼 했던 말입니다.

“저녁에 달빛이 비칠 때 비닐하우스를 보면 바닷물이 출렁이는 것처럼 보이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름답지가 않아요. 전혀….”

▲자료사진=폭설에 내려앉은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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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