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는 없다. KBS의 주장처럼 문서 형태로 된 블랙리스트는 없다. 노동계에서 횡행하는 것처럼 특정사만이 아니라 동종업체까지 공유하는 블랙리스트는 없다. KBS의 문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없고, KBS에서 퇴출된 방송인이 타 방송사에서 출연하고 있는 점에서 일단 없다.
하지만 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신하는 몇몇 인사들의 주장처럼 블랙리스트 풍토는 분명 있다. 정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김미화씨나 진중권씨 같은 특정인만이 아니다. 방송에서 퇴출된 방송 출연자 중에는 특정 매체 소속 기자(들)도 있다. 방송에서 더부살이하는 10년 동안 여러 번 들었다. 어느 매체는 마이너라 안되고 어느 매체는 좌파라 안된다는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은 바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야 들은 게 아니라 그 전부터 들었다. 의심나면 찾아보기 바란다.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던 특정 매체 소속 기자가 언제 잘렸는지, 그리고 그 기자가 나중에라도 복귀한 적이 있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
이 점을 근거 삼아 얘기할 수 있다. 방송 ‘내공’이 아니라 이념 성향과 출신 성분을 문제 삼아 호오를 가르는 건 치졸할 뿐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 가치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공자처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소용없다. 방송사는 경전 속이 아니라 바람 찬 벌판 위에 서 있다.
방송제작진은 외부 자극에 민감하다. 담당부장-국장-심의실-방송통신심의위의 겹겹 심의를 받고, 시청률-인사고과-방통위 징계의 겹겹 평가를 받는 구조에서 PD가 외부 자극과 외부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바람막이 해주는 좋은 상사를 만나면 모를까, 물먹을 걸 각오하면 또 모를까, 그렇지 못하면 위 또는 밖에서 기침만 해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처방은 달리 모색돼야 한다. 내부를 향해 ‘왜 눈치 보느냐’고 힐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외부의 일탈적 자극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다.
국정감사철이 되면 적잖이 요구한다. 국회 문방위원이 방송사에 프로그램 진행자는 물론 고정 출연자, 심지어 단발 출연자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소속사는 어디인지 미주알고주알 적어 내라고 요구한다. 해당 의원은 방송사가 출연진을 편향적으로 구성하는지 점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그런 요구가 편향적인 구성을 유도한다. 해당 의원의 성향을 살핀 다음에 그에 저촉되는 출연자가 있는지 한 번 더 살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 행여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선거철이 되면 적잖이 거론한다. 여야 가리지 않고 잘나가는 방송인을 영입해 출마시키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떠벌이고 언론은 충실히 받아 적는다. 그 탓에 방송사는 괜한 오해를 산다. 자사 소속 또는 출신 인사가 특정 정당 하마평에 오르는 순간 방송사 이미지가 특정 정파의 색깔과 겹쳐진다. 그래서 더 오그라든다. 괜한 오해 사지 않으려고, 괜한 오해에서 벗어나려고 뒷걸음질 친다.
어느 정치인이 특정 개그 코너를 거론한 것만이 사례가 아니다. 다른 정치인이 특정 방송인을 언급한 것만이 사례가 아니다. 그것들 외에도 방송사, 방송제작진의 소신을 찌그러뜨리는 요인은 이처럼 많다.
많지만 하나다. 요인은 많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집적거리는 주체가 정치권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방송 내용을 문제 삼기 이전에 출신 성분을 문제 삼는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정치권이 앞장서서 방송사에 정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방송을 상대로 정치권이 설치면 배가 산으로 가게 돼 있다.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노는 방송제작진에 맡겨야 한다.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건 좋지만 그건 공익을 저해할 때로 제한해야 한다.
방송인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방송인의 방송내용이 문제가 될 때 나서야 한다. 이게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진작하는 길이요, 블랙리스트 풍토를 없애는 길이다.
※이 글은 오늘자 ‘경향신문-미디어칼럼’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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