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10년 넘게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뉴스브리핑’을 해왔지만 ‘조두순 사건’만은 차마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끔찍한 사건을 학생들이 탄 등교 버스에 흘릴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말하지 못했습니다. ‘뉴스 보고 일기 쓰기’ 숙제를 해야 하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놈이 ‘김길태 사건’ 뉴스를 보곤 “아빠, 성폭행이 뭐야?”라고 물어봤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 수준과 정서에 맞게 풀어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지인이 ‘김수철 사건’ 뉴스를 지적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범행이 발생한 학교의 주소지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교 주소지가 보도되자마자 인근 지역 어머니들 사이에 "어느 학교더라“는 말이 퍼졌다며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2.
계속 품어왔던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알권리’ 못잖게 ‘모를권리’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은 보도하지 않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단순 교통사고를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길거리 시비ㆍ폭행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사회성과 공익성을 찾을 수 없는 뉴스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재발방지책 촉구 차원이라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뉴스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생활만 노출시키는 뉴스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3.
물론 다릅니다. ‘조두순 사건’과 ‘김길태 사건’과 ‘김수철 사건’은 이런 경우와는 거리가 멉니다. 치안망과 복지망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기에 사회성과 공익성을 충분히 담고 있는 사건이자 뉴스입니다. 그래서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감히 ‘모를권리’를 들이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이 클지 모릅니다. ‘모를권리’를 내세워 그 같은 사건의 보도를 자제하면 범인 검거에 허점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여론이 들끓는 사건엔 공을 들이면서도 세상이 무관심한 사건엔 상대적으로 심드렁했던 게 경찰의 수사관행이었으니까요.
4.
알릴 거면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왜 그런 범행이 빈발하는지, 왜 그런 범행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는지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국민에게 뿐만 아니라 정부에게도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CCTV 설치만이 대안이 아니고 화학적 거세만이 대안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런 대책들은 ‘사후’에 맞춰져 있고 ‘일부’에 국한돼 있습니다. 중요한 건 ‘예방’이고 ‘전반’입니다. 왜 사건이 빈곤가정,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집중되는지를 알려야 하고 어떻게 빈곤가정, 결손가정 아이들을 보호할지를 알려야 합니다. 김수철의 사진과 김길태의 사진을 공개하는 것 못잖게 그들 또한 빈곤가정과 결손가정 출신이란 점을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야 이른바 ‘근원적 처방’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예산타령을 하고 인력타령을 하는 정부당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예방대책과 보호대책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야 지역아동센터와 야학에 대한 지원마저 줄이는 정부 처사에 제동을 걸 수 있고, 부촌에 치안인력과 장비가 쏠리는 현상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고장 난 레코드처럼 흘러간 레퍼토리만 읊는 뉴스, 추리소설처럼 범행수법을 세세히 전하는 뉴스는 오히려 모방범죄와 유사범죄의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이런 뉴스엔 차라리 ‘모를권리’를 들이대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5.
아동 성폭행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그제는 부산에서 여중생이 길을 가다가, 어제는 대구에서 초등생이 집에 있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조두순 사건’ 뒤에 ‘김길태 사건’이 발생했고, ‘김길태 사건’ 뒤에 ‘김수철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김수철 사건’ 뒤에 다시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유사 범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화학적 거세와 전자발찌에 매달리고, 언론이 냄비 끓듯 보도를 쏟아내는데도 동종 범죄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6.
기가 막힙니다. 성폭행을 당한 대구 초등학교 6학년 여아가 그랬답니다. 중증 고혈압 환자인 아버지가 알면 충격을 받을 테니까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정부와 언론이 범행과 범인에만 매달려 있을 때 어느 초등생은 자신의 고통에 아버지의 충격까지 혼자 짊어집니다. 정부와 언론이 전자발찌와 CCTV와 약물에 매달릴 때 대부분의 아동은 흉악한 어른의 손길을 혼자 막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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