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
지난 4월 22일 자정 께 서울 대림역 6번 출구 앞에서 귀화한 조선족 김 모 씨(35)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해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김 씨는 얼마 안가 숨을 거뒀다. 사인은 골절과 지주막하출혈 등에 인한 사망이었다. 안면부 2/3이 매우 강력한 충격으로 모두 주저 않은 것이었다. 범인은 사흘만에 검거됐다. 검거된 범인은 대림역 인근 호프집에서 김 씨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던 조선족 박 모 씨(31).
박 씨는 호프집에서 김 씨가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술집을 나온 김 씨를 따라가 주먹으로 얼굴을 1회 가격한 후 쓰러진 김 씨의 얼굴을 구두 뒤축으로 2~3회 내리 찍었다.
검거된 박 씨는 ‘우발적 사건’임을 강변했으나 검찰은 ‘미필적 고의’를 지목했다. 김 씨의 홀어머니는 3대 독자 아들을 남편의 기일인 23일에 저 세상으로 보냈다며 오열했다.
사건 개요가 이렇다. 만일 당신이 재판장이라면 박 씨에게 어떤 죄를 물을 것인가?
#시민 배심원의 활약
“마음이 무겁네요.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 어려운 처지인데다가, 설명을 듣긴 했지만 법적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네요.”
지난 22일 오후 1시 30분.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한창훈)는 시민 배심원단 11명과 함께 ‘대림역 살인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에 참석한 배심원 중 주부 이선자 씨(가명)는 12시간 30분에 걸친 국민참여재판을 끝마치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존에 가졌던 저의 법질서에 대한 판단 기준과 법원의 관점에 차이가 있었지만 공감대를 이룬 판결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은 아니냐구요? 배심원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오히려 더 신중히 검토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맞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배심원인 회사원 김중식 씨(가명)도 흥분된 기색이었다.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 아닙니까. 제가 판결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흔쾌히 참석하게 됐습니다.
평정심 유지요? 바짝 긴장해서 그런지 최대한 냉철히 사건을 바라봐야 겠다는 생각밖에 안들던데요.”
이날 재판은 지난 2월 국민참여재판이 시작된 이래 남부지법에서 최초로 실시된 국민참여재판이었다. 재판부는 재판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며 국민참여재판 진행에 의욕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국민참여재판은 전국에서 30여 차례 이뤄졌다.
배심원들은 이날 오전 9시에 남부지법에 도착했다. 120명의 배심원 후보 중 1차로 40여명을 추리고 검사와 변호인 입회 하에 2차 검토를 진행, 최종적으로 선발된 배심원 9명과 예비배심원 2명이 재판정에 앉았다. 배심원들의 신분은 법으로 매우 강력하게 보장 받는다.
“처음 출석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하는 생각부터 났죠.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국민참여재판이었죠. 호기심이 일더라구요. 참석하는데 큰 고민은 없었어요.”
예비 배심원이었던 대학생 서만석 씨(가명)는 열흘 전 날아온 법원 통지서를 받은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통지서를 받은 이후 알아본 국민참여재판 제도는 서 씨에게 ‘바람직한 제도’라는 인식을 가져오게 했고, 호기심 반 ‘시민의 의무감’ 반으로 법원을 찾았다고 밝힌다.
물론 통지서를 받은 불특정 다수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왜 거길 가야하냐’며 역정을 내는 시민들도 적지 않다는 게 법원 관계자의 귀띔이다. 때문에 정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홍보 부족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피고인 최후진술을 마친 저녁 8시 께 재판부와 배심원들은 ‘평의실’로 자리를 옮겨 판결과 양형을 논의했다. 평의실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모두 비밀에 부쳐진다. 배심원이 이를 외부에 누설할 경우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평의실의 논의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의 쟁점은 피의자 박 씨의 범행이 단순한 ‘상해치사’인지, 고의가 있는 ‘살인’인지로 모아졌다.
저녁 9시 30분 재판장이 판결을 내렸다. “폭행경위와 폭행정도, 위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피해자 사망 사인에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다만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왔고, 그 동안 다른 죄가 없었던 점을 감안해 징역 9년에 범행에 사용한 구두를 몰수한다.”
재판 진행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의자 박 씨가 그제서야 얼굴을 든다. 재판장은 “배심원 7명이 살인, 2명이 상해치사로 입장이 갈려 만장일치 판결을 내리지 못했으나 다수결에 의해 판결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지루한 공방이 진행되는 동안 심리를 지켜본 배심원들이 앉아만 있는 들러리가 아니었음이 엿보인 대목이다.
“11명의 눈길이 내내 집중하고 있어서 한번 더 생각하고 변호해야 겠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놓치 못한게 사실입니다. 배심원들이 예상보다 더 진지하더군요.”
피의자 측 국선변호인 정정민 변호사의 말이다. 변호인과 검사는 그동안 재판부를 향했던 시선을 재판정 좌측 배심원석에 고정한 채 재판을 진행해야 했다.
“배심원 설득이 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지만 보통 재판보다 아무래도 용어를 쉽게 쓰고 자세히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 신경을 썼죠.”
신지선 검사 역시 “피곤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국민들이 법질서 유지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국민참여재판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다면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질문 하나. 배심원들은 자리에 앉아 듣기만 하는 걸까? 아니다. 재판장의 허가를 받으면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이날 국민참여재판에서도 재판장은 수차례 걸쳐 배심원단을 향해 서면 질문을 요구했다. 실제로 배심원들은 피의자에게 ‘가격 직후 피해자의 의식 여부를 확인했는가’ 등의 서면 질의를 재판장에게 제출했다. 재판 중간 길고 긴 심리 과정에서 졸음을 참지 못하던 노년의 배심원에게 재판장이 ‘피곤하냐’며 집중할 것을 주문하는 장면도 있었다.
또 다른 궁금점, 전문성 없는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석할 경우 불편부당하고 공명정대하게 평결할 수 있을까? 국민참여재판은 중죄 이상의 제한된 사건에 한해 피의자가 신청할 경우 이뤄진다. 복잡하게 꼬인 재판이 반드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충분한 사전 설명과 ‘공판중심 재판’을 지향해 배심원들은 최대한 정보를 제공받게 된다. 이날 역시 파워포인트를 동원해 지루할 정도로 ‘설명’ 위주의 재판이 진행됐다.
그렇다고 재판의 ‘전문성’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룻만에 치러지는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22일 국민참여재판을 방청한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논란이 있지만 직접민주주의의 확대와 공판중심 재판, 사법부 신뢰도 향상 등을 감안할 때 10~15% 정도의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참여재판은 무엇보다 지난 십수년간의 사법개혁 노력의 중요한 산물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 국민참여재판의 성패 여부를 가를 것이라고 한다.
“사법부 판결에 대한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서 없지 않았잖아요. 국민참여재판은 이를 씻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드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 볼 만 하냐구요? 예, 통지서가 오면 꼭 참석해 보라고 말하겠습니다.”
내일 출근을 준비해야 한다며 급한 발걸음을 떼던 시민배심원 김중식 씨의 말이다.
▲사진=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 장면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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