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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2년 대선 때의 일입니다.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을 비롯해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부산 기무부대장, 부산시 교육감 등이 '초원복집'에 모여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을 공모합니다. 그리고 정주영 후보의 통일국민당이 이들의 관권선거 공모 내용을 도청해 세상에 공개합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돌면서 영남지역에서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했고 통일국민당은 도청을 일삼는 세력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다시 '초원복집사건'을 떠올립니다.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사건을 보면서 '초원복집사건'과 같은 듯 다른 점을 확인합니다.

2.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갑자기 경기 일산경찰서를 찾았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납치미수사건을 단순폭행사건으로 치부한 경찰을 질타했습니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흘러 범인 이모 씨가 검거됐습니다.

언론이 대비합니다. "별일 아니라고 보고 간단히 끝내려는 일선 경찰의 (안일한) 조치"를 힐난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죄송합니다"라고 머리 조아리는 이기태 일산경찰서장을 대비합니다.

언론이 정리합니다. "경찰을 움직인 것은 대통령의 질책이었고, 대통령을 움직인 것은 시민의 공분이었다(동아일보)"고 합니다.

언론이 풀이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채찍 들고 경찰서를 찾은 속뜻'은 "취임 한 달이 넘도록 온갖 질책과 비판을 가해도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않는 일선 현장 공무원들의 복지부동(매일경제)"을 질책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덕분에 칭찬이 쏟아집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이명박 대통령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습니다.

3.
'남'이 됐습니다. 언론의 묘사 덕에 이명박 대통령과 이기태 일산경찰서장은 '남'이 됐고, 대통령의 개혁의지와 일선경찰의 복지부동은 '남의 일'이 됐습니다.

이 점을 보면 명백히 다릅니다. '초원복집사건'에선 '우리가 남이가'를 열창했지만 일산 납치미수사건에선 '우리는 남이다'라고 싸늘하게 선언합니다.

그래도 같습니다. 일산 납치미수사건에서도 이미지 전도 현상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김영삼 당시 후보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신을 한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부실수사의 최고 책임자'에서 '무사안일 경찰을 개혁하는 히딩크'로 옷을 바꿔 입습니다.

4.
여러 사람이 입을 모읍니다. 경찰이 시국치안에 몰입해 민생치안을 뒷전으로 제쳐놓다보니  납치미수사건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도 나옵니다. 시위 참가자가 쇠파이프만 들어도 처벌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납치미수범이 어린이에게 흉기를 들이댔는데도 단순폭행으로 치부하는 경찰의 처사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미지 전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관성이 없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초 법질서 강조와 경찰의 안일한 민생치안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정정해야겠네요. 기초 법질서는 모든 걸 포괄합니다. 납치미수도 예외는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초 법질서 확립을 주장하면서 '떼법'과 '정서법'을 강조한 결과입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국민 정서에 호소해 법질서를 문란케 하는 사람들은 '시국'에 몰려있으니까요.

경찰의 '몰입치안' '쏠림치안'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경찰의 '알아서 기는' 태도가 본질이지만 더불어 이명박 대통령의 '포괄적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행정 책임자라는 그의 위치로 봐도 그렇고, 치안에 대한 그간의 발언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경찰의 맞은편에서 복지부동 경찰을 질책하는 개혁가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5.
시시콜콜한 말도 나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산경찰서 방문이 범인 검거의 결정적 계기였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합니다.

앞서 전해드린 언론의 묘사에 반발해 이런 주장이 나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산경찰서를 들르기 전에 이미 전담수사반이 꾸려졌다는 사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이 경찰서에 나와 질책하지 않았으면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을 것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곁가지입니다. 이런 논란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현장을 직접 챙기는 모습을 높이 평가하는 게 도리입니다.

줄기는 따로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특정 사건에 대해 일선 경찰서를 찾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일 만큼 민생치안에 구멍이 뻥 뚫렸다고 느꼈다면 어제 방문을 분기점으로 삼았어야 합니다.

시국치안에 몰입하는 경찰의 폭주를 지적하면서 최소한 '균형잡힌' 치안이라도 펴라고 엄중히 지시하는 자리가 됐어야 합니다. "일선경찰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에 '쏠림'을 지적하고 '균형'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어야 합니다.

어제 못 했으면 내일이라도 해야 하는 말입니다.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