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승사자’도 사람인가 봅니다.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네요.
박재승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랬습니다. “공천 탈락 대상자 중에는 제 후배도 있다”고 했습니다. 칼 같은 공천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인간적 고뇌가 적지 않았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 또한 사람인 것을….
국민의 칭찬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멀리 있습니다. 봄 들녘의 아지랑이 같은 것입니다.
원망은 오래 갑니다. 오랜 지인이 가까운 곳에서 보내는 가시 돋친 눈길이기에 피부가 따끔거립니다.
국민의 지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금배지를 달려 하거나 더 높은 자리를 꿈꾼다면 국민 지지는 귀중한 자산일 겁니다. 그렇게 이미지 하나로 정치적 위상을 높인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런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공천심사위원장을 맡는 건 금배지를 달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특정 정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으면 정치색이 규정돼 사법부의 요직을 맡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남는 것 하나 없고 오히려 원망만 사는 일을 왜 하는 걸까요?
박재승 위원장이 그랬더군요.
“욕먹기 싫어서 안 한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2.
‘악질검사’가 한 명 있습니다. 조폭들에게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검사’로 소문 난 조승식 대검 강력부장입니다. 아, 어제 퇴임을 했으니까 ‘전’ 강력부장이군요.
검사 생활 29년 가운데 20년을 조폭과 깡패를 잡아들이는 데 보냈다고 합니다.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씨, 칠성파 두목 이강환 씨, 영도파 두목 천달남 씨 등을 모조리 잡아넣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입니다.
‘악질검사’에게 친한 친구가 결별을 통보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같은 마을에서 나고 같은 초․중․고교를 다닌 ‘불알친구’가 의절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내 머릿속에서 네 이름을 지워버리겠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1989년 군사시설 보호구역이 해제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장교와 민간인 등 20여 명이 부동산 투기를 해 수십 억 원을 챙겨 구속됐습니다. 이 사건에 조승식 검사의 ‘불알친구’가 연루돼 구속됐는데, 이 친구를 구속시킨 장본인이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일하던 조승식 검사였습니다. 조승식 검사는 수사관들에게 친구 집 약도를 그려줬고, 집 문을 열어주지 않고 버티던 친구와 전화통화를 해 문을 열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국세청에 통보해 친구의 부당이득을 추징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배신감이 컸나 봅니다. ‘불알친구’는 조승식 검사에게 의절을 선언했고 두 사람은 그 뒤 9년 동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 아는 사람 경조사에서 만나기라도 할까봐 상대방 동선을 미리 파악해 피해 다녔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나 봅니다. 조승식 검사가 어제 퇴임을 하면서 그랬다는 군요.
“친구를 가슴 아프게 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시 묻습니다. 왜일까요? ‘악질검사’는 왜 친구를 ‘배신’한 걸까요? 왜 마음고생을 사서 한 걸까요?
조승식 검사의 이 말이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검찰 간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지만 현장에서 조폭을 잡는 강력부 평검사는 지금도 할 수 있다.”
3.
소명의식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욕먹기 싫어서 안 한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라는 박재승 위원장의 반문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등 떠밀어서도 아니고, 제 잘 나서도 아닙니다. 그냥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한 것입니다.
믿음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게 옳을 겁니다.
‘악질검사’가 ‘불알친구’와 화해했다고 합니다. 9년 뒤 한 상가에서 조우해 새벽 6시까지 술을 마신 뒤 다시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이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참된 지인이라면 옳은 길을 가는 자신의 마음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4.
새로울 것 없는 얘기입니다. 학교 다닐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배운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그런데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요? ‘저승사자’와 ‘악질검사’를 보면서 슬며시 미소 짓는 이유가 뭘까요?
교과서와 현실의 간극 때문일 겁니다. 원칙주의자가 ‘꼴통’으로 비하되는 세태 때문일 겁니다. 이런 세태에 함몰돼 딱딱하게 굳어버린 윤리의식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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